이렇게 걷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Day 2 (下)
오늘은 어디까지 가세요?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매암제다원까지 태워주시며 오늘의 여행 일정을 물었다. 사실 우리는 만보 클럽이며 걷는 걸 좋아해 하루 삼만보 이상 걸을 생각으로 하동에 왔다고 답했다. 섬진강 줄기 따라 강변을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다는 말도 함께.
사장님은 “원래 차로 여행하시는 분들한테 추천하는 곳이긴 한데요…” 라며 걷기에 좋은 곳은 아니지만 멋진 곳이라며 장소 몇 곳을 추천해주셨다. 여행지의 랜드마크를 다녀오는 것보다 정처 없이 걷다 발견한 장소의 매력을 좋아한다 말하는 나였지만 왠지 모두 가보고 싶은 욕심이 피어났다.
배를 통통 튀기며 오리고기 집에서 나와 천을 따라 걸었다. 흐린 날씨라 모든 풍경이 선명하진 않았지만 멀리 보이는 산이 수묵화 같아 묘하게 아름다웠다. 무화과처럼 생긴 나무와 매실을 보니 여름이 오는 게 맞았다. 우리는 길 옆 가장자리 흙을 밟거나 때때로 등장하는 인도로 걸었다. 하동군은 왜 걸을 수 있는 길을 안 만들었을까? 의문을 나누다가도 알게 뭐람 노래나 불렀다.
이리저리 걷다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최참판댁까지 내려왔다. 오서방이니 막딸이니 배경지식이 없어 영 시원찮아진 우리는 아무 정자에 자리를 잡고 누워 낮잠을 잤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흐린 하늘이었다. 사장님이 말씀하신, 차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는 한산사를 다녀오면 좋을 것 같아 언니의 컨디션을 살피며 물어봤다.
‘30분 이하는 걷기’라는 만보클럽 규칙상 평소라면 주저하지 않았을 테지만 언니는 물리치료를 받고 있었고, 무릎 보호대를 숙소에 놓고 왔다. 마음이 쓰였지만 천천히 걸으면 걸을 수 있다는 언니의 말에 우리는 20분 거리의 한산사를 향해 걸었다. 아니 올랐다.
한산사는 생각보다 꽤 높은 곳에 있었다. 차도 낑낑대며 올라가는데 과연 걸어서 올라간 사람은 있었을까? 경사가 높아 아래에서 내려오는 차가 혹여나 우리를 보지 못할까 걱정하며 운전자 시선에서 보일만한 방향으로 걸었다. 괜히 걷자고 한 건 아니었는지 민망해 연신 파이팅만 외쳤는데, 듣는 입장에선 습한 공기 같은 말이었겠지.
구비구비 올라 도착한 한산사는 아래를 내려다보면 왼쪽으로는 최참판댁과 네모 반듯한 논이, 오른쪽으로는 동정호와 섬진강이 보이는 절경 속에 있었다. 힘들었지만 올라오길 잘했다. 부처님께 절을 하며 소원을 비는데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다시 털레털레 내려와 저녁을 먹기로 한 주막까지 걷는데 무릎이 아파 결국 콜택시를 불렀다. 그런데 기사님마다 지역이 달라 가지 못한다거나 너무 멀리 있으니 콜을 취소해달란 말을 하셨다.
어쩔 수 없이 40분 거리를 걸었다. 내가 진짜 도착하면 막걸리를 어? 쭉쭉 찢은 파전이랑 들이마실 거야. 언니보다 앞서 걸어 주막 문을 호기롭게 열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설마 하며 현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사장님 왈
“멀리 나와있어서 오늘은 못 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