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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목 Dec 29. 2022

冬至 : 싫어하는 팥죽을 받아 들여야만해


  스쳐가는 날씨들은 우리를 시간 여행자로 만든다. 하릴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그 언젠가의 씁쓸함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맑은 하늘 아래에서는 떠다니는 구름만큼 둥둥 뜨게 만드는 즐거움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떠오르는 기억이 뜨거운 것이든 차가운 것이든 가리지 않는다. 눈이 쏟아지던 이번 겨울의 날에 역시 그랬다. 나는 떨어진 눈을 바라보며 옛이야기의 되새김질을 시작했다. 저녁이 잔뜩 길어진 동지의 밤. 태초의 새벽이 열린 이후 무수히 지났을 그날 가운데 내가 겪은 32번째 동지의 날이었다. 크나큰 생명의 역사에는 비할 바가 되지는 못하는. 그러나 미약하게나마 동지의 역사에 일조했음이 분명한 날이었다.


   우리가 매 순간 지난날의 어느 날인가를 기억하는 행위는 지극히도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다음에 기억할 오늘은 기억을 되새김질 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기억은 없을 거라는 마음에 아쉬움이 찬다. 그러니 글을 적어간다는 것은 지나간 날들을 하나씩 곱씹는 대신 오늘을 희생하는 것일 테다. 희생하는 것은 시간뿐만이 아니다. 이따금은 지나간 줄 알았던 감정의 생채기들이 다시 생기기도 한다. 결국 감정 역시 되새김질의 과정에서 제물이 되고야 만다. 그럼에도 하루를, 혹은 며칠을 소비하며 안개 너머에 가려져있던 기억을 온전하게 끌어오려 노력하는 이유는 나름의 가치가 있어서 그렇다.


  보잘것없는 거리. 걸어 다니는 사람 찾기가 어려운 길가에 있는 한 식당으로 우리는 들어섰다. 이름부터 구수한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다락방’. 어감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곳이었다. 구수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다락방’이라는 존재는 어린 시절에 온갖 짐들이 즐비하게 박혀있던 장소였다. 이따금 벌레도 마주했다. 다락방 문을 열면 여느 공포영화와 같이 세상의 죽은 것들이 들어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같은 이름을 가진 식당에 드는 감정은 즐거움보다 꺼림칙함이 더욱 크다. ‘다락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식당이 ‘아이러니함’이라도 갖추었으면 좋을 성싶은 적도 있었다. 이름과는 다르게 모던한 느낌이라면 식당에 대한 반감은 덜하지 않았을까. 좋든 싫든 엄마와 아빠의 손에 이끌려 가는 곳이라면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사실, 내가 그곳을 싫어하게 된 배경은 이름에 얽혀있는 이미지 뿐만은 아니었다. 그곳은 엄마의 아지트나 다름 없었다. 동네 아줌마들과 친목을 다지는 곳. “이번에 누구는 몇 점 맞았대?” “이번에 어느 집 애가 그런 짓을 했다며?” “이번애 우리애가 세상에 상을 받았지 뭐야?” 따위의 이야기들이 오가는 곳. 10대의 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오가리라 직감했다. 그 아지트를 다녀온 엄마의 표정에 따라서 집의 분위기가 달라지곤 했으니까. 그리고는 마치 서로에게 비밀은 없다는 듯 관심도 없는 친구들의 소식과 나의 문제점을 엄마는 콕콕 집어 전달했다. 그리고는 상심하지 말라며 “그냥 너의 친구들이 그랬대. 너한테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은 아니야.” 라는 말을 꼭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그 말만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씁쓸함과 남을 부러워하는 표정이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나는 엄마가 아지트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아이들을 대신하여 어느 집 애가 더 잘났는지 자랑이나 험담들이 오가는 그곳을 다녀온 날이면 엄마가 전투에서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 가늠하느라 눈치가 늘었다. 일 주에 한 번씩 빠지지 않고 돌아오는 그 시간을 증오했다. 나는 처음으로 타인이 망하길 바랬다. 그러나 바램은 바램일 뿐이었다. 날이 갈 수록 엄마가 아지트를 방문하는 횟수는 늘어가기만 했다. 그리고 언젠가 부터 엄마의 아지트는 우리가 한 달에 한 번은 방문하게 되는 식당이 되었다.


  그렇게 20여년 전의 동짓날에 우리 가족은 ‘다락방‘을 찾았다. 낮은 식당의 상에 네 사람이 차례로 자리를 잡는다. 가장 구석의 벽은 가장 덩치가 큰 아빠의 차지였다. 그 옆은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 하던 동생이 자리를 잡았고 아빠의 건너편엔 엄마가 자리했다. 나는 옆 상과 가까우면서도 아빠와는 거리가 먼, 대각선에 앉았다. 모두의 표정은 밝았다.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선물이라도 받는 날을 맞이하는 사람들 같았다. 밖의 차가운 겨울의 기운을 안고 들어와서인지 자리에 앉은 우리의 입에서는 여전히 입김이 나고 있었다. 엄마는 원래 이 곳은 갈치조림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겨울에 먹는 갈치조림이라니… 나는 갈치조림을 먹을 생각에 잠시 들떴다. 포슬포슬하게 잘 익은 무와 갈칫살을 밥에 비벼먹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웬걸. 엄마는 요즘은 팥죽도 맛있다며 동지를 맞아 팥죽을 주문했다. “언니 여기 팥죽 4인분이요” 라는 엄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의 입맛도 끝났다. 그러나 나의 들뜸은 현실로 이어지진 못했고 악몽의 서막이 올랐다. 어릴 때부터 싫어하던 팥죽이라니. 아주 끔찍했다. 얼마나 싫었으면 8살 즈음에는 팥죽이 너무 싫은 나머지 스스로가 혹여 사람이 아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팥을 뿌리면 무서워 도망간다던 도깨비. 그 때는 팥죽을 싫어하면 스스로가 도깨비일 것이라 믿으며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15살 즈음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싫은 것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다.


 엄마의 주문에 식당 방 문이 드르륵 열렸고 푸근한 파마 머리의 주인 아줌마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넉살 좋게도 생긴 모습에 아줌마가 만들어 낼 음식의 양은 당연하게도 푸짐할 것이 확실했다. 그 푸짐한 양으로 동네 아줌마들을 꼬드기고 그곳을 아지트로 삼게 만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웃으며 “그래요. 태호 엄마” 라는  순간 나는 주인 아줌마를 째려봤다. 주인 아줌마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째려보던 나의 눈빛은 이제 엄마에게 향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알고 있던 내 이름. 마치 말 안듣는 다던 그 이름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듯한 눈빛과 미소를 건네는 주인 아줌마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용기는 없었다. 내가 자리를 박차는 순간 주인 아줌마의 확인은 확신으로 변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한 아이의 무용담이 되어 그곳에 발을 들인 이들에게 회자될 것 역시 분명했다.


  자리를 뜰 생각으로 가득 찬 지 얼마나 되었을까. 드르륵 문이 열리고 김이 뜨거운 노천탕처럼 올라오는 팥죽이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싫어하던 팥죽이 가득한 그릇이 책상에 올라온 그 모습이 주변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싫어하는 장소, 싫어하는 분위기, 싫어하는 음식. 이런 것이 바로 삼위일체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 와중에 아빠가 국자를 들었다. 단단한 국자가 몇 번 팥죽을 담아낸다. 아빠는 늘 그렇듯 엄마, 여동생의 순서로 차례를 지켜 배식을 했다. 마지막은 아빠와 가장 멀리 떨어져 앉은 내 차례였다. 아빠는 내 그릇에 팥죽을 담으려다 멈췄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팥죽 안 좋아 하는 건 알고 있는데 동지니까 먹어라.” 말을 마친 아빠는 멈칫 했던 국자를 다시 움직인다. 그리고는 기어이 내 그릇에 적갈색의 그것들을 옮겼다. 차마 숟가락을 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 먹어내야 했다. 다른 이들이 세 그릇 가까이 비워낼 동안 나는 겨우 한 그릇을 비웠다.


  그 때가 시작이었다. 20살이 되어 둥지와도 같던 엄마 아마의 품을 벗어나던 해까지. 매년 동지가 다가오면 우리 가족은 어김없이 엄마의 아지트에 가서 팥죽 한 그릇을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더는 내가 도깨비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싫은 것도 받아들이는 연습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 받아들였다. 그런 이유로 여전히 나는 팥죽이 싫고 엄마의 아지트가 있던 거리가 싫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엄마의 아지트였던 그 ‘다락방’이라는 이름의 식당도, 주책이던 주인 아줌마도 어느 순간엔가 사라져서 소식을 듣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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