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리우스 Apr 11. 2024

쪽지

첫번째 이야기

1996년 겨울 고등학교 1학년때 한성대입구역 근처에 살고 있는 친구집에 놀러 갔었다. 친구집이 성북동처럼 산중턱에 있었는데 언덕으로 올라가는 골목 입구로 걸어가고 있었다. 동네가 고풍스러운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 골목 입구가 영화 세트장처럼 낭만적이었다. 오렌지색 가로등이 골목을 비추는데 그때 귀엽고 예쁜 여학생 한 명이 골목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여학생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용기를 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고등학생이세요?"

"네."

"몇 학년이세요?"

"고등학교 2학년이요."


 2학년 여고생이었다. 나보다 누나였지만 나는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사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얼굴도 생각이 안 나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여고생 누나는 나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내 손안에 베이지색 작은 쪽지하나에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게 기억난다. 예쁜 누나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쪽지를 받아 들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아마도 친구집으로 가는 언덕길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뒤 소중하게 간직해 두었던 쪽지를 펴서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통화연결 음악이 들리는데 긴장된 마음에 침을 꿀꺽 삼키면서 누나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누구세요?"

"저.... 며칠 전에 연락처 물어봤던 고등학생 남자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누나와 전화 연결이 되고 우린 밤늦게 한성대입구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누나는 우리가 한 살 어린 줄 알고 여동생을 보내겠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린 참 순진하고 순수했다. 밤 12시에 친구들 4명과 함께 한껏 멋을 부리고 친구집이 있는 언덕을 한참 내려와  4호선 한성대입구역 지하철역 근처로 갔다. 겨울이었는데 나는 특별히 멋을 부린답시고 쫄티를 입고 나갔다. 아주 추웠는데 나는 배가 차가우면 바로 배탈이 스타일이라서 점점 배가 아파왔다. 금세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신호가 강하게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배변활동으로 여고생의 만남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참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택시 한 대가 우리 앞에 섰다.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여성이 택시에서 내렸는데....

작가의 이전글 솜사탕 벗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