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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우스 Dec 05. 2024

하얼빈

김훈 작가의 장편소설 하얼빈을 읽었다. 문장과 단어들이 어려웠다. 대학전공책을 중고등학생이 읽는 것처럼 문장을 온전하게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내용을 알고 있기에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페이지를 펼치자 끝까지 읽을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는 책이었다.  


- 이토는 시간이 제국의 공적 재산이라는 인식을 조선 사대부들에게 심어 넣으려 했으나, 시간의 공공성을 이해시킬 길이 없었다. 이토 자신이 설명의 언어를 갖추지 못하기도 했지만 시간을 계량하고 시간을 사적 내밀성의 영역에서 끌어내 공적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문명개화의 입구라고 설명을 해도 고루한 조선의 고관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이었다. p.13


시간은 사적으로 사용하지만 공적인 질서가 있다는 의미가 와닿았다. 책은 인물의 내면의 목소리를 지면을 통해 들려준다. 이토의 마음, 안중근의 마음은 마치 '흑과 백' 같았다. 두 사람의 마음이 닮은 듯한 톤, 느낌, 감성, 성향으로 독백하는데, 마치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은 어둠의 수장, 다른 사람은 빛의 투사지만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그러면서 회색 같은 다른 듯 닮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독백의 문장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문장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마음을 읽을 때면 세상이 조용해지고 오로지 그들의 마음이 들려왔다. 자기 마음도 알기 어려운데 다른 사람 마음속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소설은 그런 사람의 마음속을 들려주고 보여주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것 같다. 독자가 오로지 문장에 집중하게 만드는 능력만큼 훌륭한 작가의 역량이 또 있을까? 김훈 작가의 힘이 느껴졌다  

 

조선 폭민들의 소요사태가 소규모 다발성으로 일계의 대세를 이루지 못한다는 이토의 말처럼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 일계의 대세를 이뤄 휩쓸듯이 침략했다. 철저한 준비를 하고 단칼에 베어버리는 사무라이 정신의 나라가 일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유유자적 수수방관 태평하게 노닐다고 사태가 벌어지면 그때 부랴부랴 막무가내로 망치를 휘두르며 죽기 살기로 싸워서 나라를 지켜내는 특별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나라에서도 안중근 문중의 사내들처럼 늘 옷차림이 반듯했고 앉는 자세가 곧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도 정직하고 곧은 태도의 공직자였다. 국가의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그런 인물들이 중요하게 쓰임 받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다.


- 한번 길을 내면, 길이 또 길을 만들어내서 누구도 길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힘이 길을 만들고 길이 힘을 만드는 것입니다. p40


이토가 순조에게 일본과 조선이 철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된다는 말이 나온다. 길과 힘에 대한 표현이 훌륭했다. 이토는 물리적 길을 말하는데, 순조는 충절과 법도와 인륜의 길을 말한다. 이토는 그 말을 받아 과거와 현재의 미래 시간적 라인을 설명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걷는 길이 있고 걸어야 할 길이 이 씨가 가야 할 길이 있다. 시간의 길을 걸어야 하고, 지켜야 할 전통과 법도의 길이 있다. 그리고 가야 할 곳이 있다.


조선과 일본, 하얼빈을 넘나드는 공간적 구성에서 인물들과 함께 공간을 이동하는 경험을 했다. 또한 바다, 산, 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장면부터 안중근의 갓 태어난 아기의 젖니를 묘사하는 장면까지 줌인과 줌아웃되는 시각적인 표현이 영화를 보는 듯했다.


- 우덕순 같은 하층 불량배에게 정치사상이 있고 그것을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정신의 용력이 있다는 것을 미조 부치는 인정할 수 없었다. p 211

- 안중근은 범행에 사용할 자금이 없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석산에게 백 루블을 강탈했고 우덕순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하숙집에 숙박비 칠 루블이 밀려 있다. 이런 부랑아들이 천하를 짊어지겠다는 것은 미치광이의 과대망상이다.라고 미조부치는 말했다. p 239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한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일본은 안중근과 우덕순을 미치광이 가난뱅이로 만들려고 했다. 그렇다면 일본이야말로 테러국가이고 미치광이 나라가 아닌가?


안중근은 몸속에서 버둥거리는 말들을 느꼈다. 말들은 탄창 속으로 들어가서 발사되기를 기다리는 듯하다가 총밖으로 나와서 긴 애열을 이루며 출렁거렸다. 말은 총을 끌고 가려했고, 총은 말을 뿌리치려 했는데, 안중근은 마음속에서 말과 총이 끌어안고 우는 환영을 보았다.  p228


최근에 현충원에 갔는데 안중근의 묘소를 찾지 못했다. 아직까지 유해의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김구 선생도 여순감옥 공동묘지에서 유해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그의 몸은 대의와 가난을 합쳐서 적의 정면으로 향했던 것인데, 그의 대의는 후세의 필생이 힘주어 말하지 않더라도 그가 몸과 총과 입으로 이미 말했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p306


김훈 작가는 2021년 몸이 아프고 2022년 회복된 후 남은 여생의 시간을 생각하고 더 이상 미루어 둘 수 없다는 절박함이 벼락처럼 자신을 때려 안중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가의 말이 가슴에 울린다.


안중근이 이토를 쏠 계획을 하고 그의 처자식을 하얼빈으로 부른다. 가족이 이토를 쏘기 전날 왔다면 아마 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토에게 총을 쏜 안중근의 내면을 어떻게 모두 표현할 수 있을까? 죽기 전에 가족을 보고 싶은 마음, 죽음으로 향해가는 자신을 가족이 막아 주길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흔들리고 두려운 그의 내면의 목소리가 보이지 않지만 크게 울려 퍼진다. 올바른 선택을 위한 그의 고뇌, 죄와 벌, 선과 악에 대한 고뇌, 천주교인으로서 적의 수장을 쏴야 하는 번뇌와 갈등과 두려움이 역사의 길에서 우리에게 깊이 소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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