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중한 우리 엄마
엄마의 금팔찌가 사라졌다. 엄마는 나에게 금팔찌를 못 봤느냐고 물었다. 그 금팔찌는 나도 알고 있었다. 한동안 엄마한테 빌려서 차고 다녔었기에 어떤 디자인인지 알고 있었다. 둥근 사슬 모양에 두께감이 꽤 있는 금팔찌였다.
엄마는 금팔찌를 잃어버리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을 것이다. 금팔찌가 없어진 날, 자신의 모든 동선을 시뮬레이션하며 금팔찌의 행방을 찾았을 것이다. 금팔찌의 행방이 묘현해지자 가족 중 한 명을 의심했을 것이다. 나도 분명 용의자의 선상에 있었을 테다. 날 의심하며 금팔찌의 행방을 캐물었을지도 모른다.내가 가져갔다면 차라리 엄마의 마음이 편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엄마의 물건을 웬만하면 손대지 않는다.
고등학생 때 가출을 하려고 엄마지갑에 손을 댄 적이 있다. 엄마 지갑에서 카드를 하나 꺼냈다. 카드에서 돈을 인출한 후 친구집에서 며칠 지낼 계획이었다. 지하철 ATM 기에 가서 카드를 넣었다. 그런데 기계 디스플레이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통장에 돈이 들어있어야 되는데, 마이너스 700만 원 정도라고 표시가 되어있었다. 마이너스? 그때는 마이너스 통장의 개념을 몰랐다. 돈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이너스 돈이 있어서 어이가 없었다. 곧바로 카드를 구겨서 버려버렸다. 그리고 가출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아무튼 나는 엄마의 금팔찌를 손대지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 질문을 하면서 나의 눈동자, 나의 태도, 목소리의 자연스러움의 정도를 셜록홈스처럼 관찰했을 것이다. 물론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엄마도 알겠지만 나는 그렇게 주도면밀하지도 않고 거짓말을 순발력 있게 하지도 못할뿐더러 무엇보다 감정을 감추는데 서툰 편이다. 나의 자연스러운 대답에 아들은 우선 용의 선상에서 자연스럽게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빠와 여동생이 남은 상황, 엄마는 각각의 용의자에게 어떤 스타일로 심문과 함정수사를 펼쳤을까? 얼마나 철저하게 1:1 심문을 했는지 나는 그들이 심문을 당했었는지 조차 모른다. 엄마는 온 가족이 없을 때 온 집안은 물론이고 쓰레기통, 종량제봉투, 음식물쓰레기통, 옷장, 침대 및 모든 공간을 뒤졌을 것이다. 금반지도 아니고 묵직한 금팔찌였으니까. 하지만 모든 수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허탈함과 아쉬움, 비싼 금붙이를 잃어버린 아까움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을 것이다.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엄마로서 커다란 마이너스가 생긴 상황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귀금속은 여성들이 특히 아끼는 보물 아닌가?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타고 속이 까맣게 탔을지, 속상한 마음에 가슴을 얼마나 쳤을지 짐작이 가는 바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금팔찌는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그렇게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어느 날.
금팔찌 때문에 까맣게 탔던 엄마의 마음도 흐릿해질 때쯤이었다. 금팔찌가 없어지기 며칠 전 내가 새로 산 점퍼가 있었다. 잠실 지하상가에서 샀던 슬림핏 재킷이었다. 야구점퍼스타일인데, 아주 슬림하게 나온 스타일이었다. 대부분의 옷이 그런 것처럼, 그 옷도 옷가게에서는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몇 번 입어보니 나에게 어울리지가 않았다.
나는 머리가 크고 키가 작고 배가 나오고 다리가 짧고 오리엉덩이, 그리고 어깨가 넓지 않은 평범한 모범생 같은 스타일이다. 그런데 그 슬림핏 재킷은 나의 체형과 반대인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디자인이었다. 몇 번 입다가 어울리지가 않아서 그냥 옷걸이에 걸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문득 그 옷을 다시 입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팔 한쪽이 안쪽으로 말려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팔을 빼려고 옷을 뒤집어봤는데, 웬걸! 안쪽으로 말려들어간 팔부분에 그 금팔찌가 돌돌 말려있는 것이 아닌가?
엄마가 내 방에서 내 점퍼를 입어본 것이다!
엄마는 통통과 뚱뚱의 중간쯤 되는 여사님이시다. 처녀 때 사진을 보면 날씬하고 우아하고 아리따운 세련된 여성이었는데, 힘들고 고단한 풍파 많은 인생을 살다 보니, 상처와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살이 되어 살이 찐 엄마다.
내가 입기에도 타이트했던 옷을 엄마가 입었으니 얼마나 타이트했겠는가? 알겠지만 타이트한 옷은 일단 입을 수는 있다. 그런데 벗기는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스키니진이나 몸에 붙는 면,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옷을 벗는 건 거의 묘기에 가까운 몸동작을 해야 한다.
일단 엄마도 나의 스키니 점퍼를 겨우 입는 데는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입고 나서 벗는 데는 진땀을 흘렸을 테다. 일단 그 옷은 소매 부분이 아주 좁았다. 나의 얇은 손목에도 여유가 없었으니, 엄마의 손목을 단단한 압박밴드처럼 강하게 압박했을 것이다.
엄마는 오른손잡이니까 우선 점퍼의 왼팔 부분을
잡고 앞으로 잡아당기며 왼팔을 뺏을 것이다.
그리고 팔꿈치와 어깨를 움직이며 점퍼의 반을 벗었을 테다. 그리고 왼손을 이용해서 오른쪽 어깨에 걸려있던 옷을 잡아당기며 오른팔을 빼려고 했을 것이다. 왼팔로 옷을 앞으로 잡아당기며 오른팔을 뒤쪽으로 뺄 때, 팔목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던 소매가 뒤집어지면서 역회전을 했을 것이고, 그 얇은 구멍의 소매 안에 엄마의 금팔찌가 같이 껴있는 상태에서 함께 돌돌 말아졌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오른손을 빼기 위해 최대한 오므렸을 것이다.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어려운 법, 아무리 손을 오므려도 팔이 잘 빠지지 않자 있는 힘껏 잡아당겼을 것이고, 최대치에 힘을 주며 압력의 최고점에 도달하여 오른손이 빠지지 시작할 때, 소매안에 감춰져 있던 금팔찌가 함께 벗겨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옷이 돌돌 말리면서 금팔찌가 옷에서 떨어지지 않게 된 게 이 사건이 한 달 동안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 핵심 포인트였다.
아들의 스키니 점퍼를 입어보고 진땀을 뺀 엄마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고, 한참동안 거친 숨소리를 뱉었을 것이다. 옷걸이에 내 점퍼를 원래 모습대로 걸어두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정수기로 가서 시원한 물 한 장을 마셨을 것이다. 자신의 금팔찌가 없어진지도 모른 체 말이다. 일단 내 방을 한번 염탐하고 평소에 못 보던 아들 옷까지 입어봤으니, 내 방에서 볼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 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허전함을 느꼈을 테다. 오른쪽에 느껴지는 금속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 하는 마음에 오른쪽 손목을 내려다본다. 번쩍이는 금색의 물체가 보이지 않는다. 눈이 이리저리 돌아가며 금팔찌의 행방을 생각해 본다.
'샤워실에 뒀나? 화장대? 싱크대에서 빠졌나? 고무장갑??'
심장이 두근거리며 집안을 수색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앞에서 말한 탐문수색이 펼쳐졌을 것이다.
엄마가 금팔찌를 잃어버리고 한 달이나 지나서 스키니 점퍼에 매달린 금팔찌를 보자, 나는 탄광에서 금맥을 발견한 광부처럼 기뻤다. 엄마가 내 방에서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지 곧바로 감이 왔다. 나는 곧바로 거실로 가서 엄마의 금팔찌를 찾았다고 말했다.
"엄마 금팔찌 찾았어!"
"금팔찌 찾았어? 어디서?"
"어디 있었는지 알아? 엄마 내 옷 입어봤지?"
"니 옷? 내가 왜 니 옷을 입어?!!"
엄마는 내 옷을 안 입었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내 옷 팔 부분에 돌돌 말려있던데? 내 옷 입어 봤잖아!"
"내가 왜 니 옷을 입어!"
엄마는 끝까지 내 옷을 입지 않았다고 발뺌을 했고 나는 엄마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금팔찌를 찾았고, 나는 금팔찌를 찾는데 큰 공을 세운 아들이 되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면 10퍼센트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이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방에 들어가자 엄마는 금 팔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거기 껴있었구나, 팔이 그렇게 안 빠지더라! 찾아서 다행이다! '
나는 엄마 옷을 입어보진 않는다. 가끔 나와 맞을 만한 맨투맨이나 니트는 입어보기도 하지만 여성복을 입어보진 않는다. 그런데 엄마는 내 옷을 종종 입어보는 모양이었다. 엄마는 다 큰 아들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종이인형 놀이를 해서, 남자보다 더 옷을 입어보고 싶어 하는 걸까? 엄마의 금팔찌를 찾아서 다행인 날이었다. 엄마의 기분이 아주 좋았으리라 믿는다.
예전에 그런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의사가 결과를 말해준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네....? 뭐.... 뭐가요?? 뭐가 얼마안남아요?"
의사의 말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묻는다. 얼마 안 남았다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다름 아닌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말했던 것이다.
부모님과 같이 사는 경우에는 아침저녁 볼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점점 짧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고, 떨어져 산다면 특별한 날만 볼 수 있으니 앞으로 부모님과 볼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의 총합을 계산해 보면 과연 몇 시간이 될까? 며칠이나 될까? 몇 달이 되긴 할까?
엄마..... 엄마란 단어에..... 엄마라는 말에 눈물이 고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이 결혼을 한다는 건 이젠 인생을 자녀에게 모두 바친다는 의미라고 들었다.
우리 엄마도, 우리의 엄마들 모두,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인생을 바친 소중한 분들이다.
컸다고, 혼자 할 수 있다고, 엄마를 무시하는 건,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기억력이 나쁜 개구리 같은 사람이다. 엄마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해서, 우리에게 빚을 졌다한들, 나를 태어나게 해 주고, 나를 사람구실 할 수 있을 때까지 20년 넘게 키워준 빚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상처가 깊어지면 곪아지고, 오해가 쌓이면 점점 돌이킬 수 없듯이. 나이가 들수록 부모자식이 더 가까워지는 사이가 있는 반면 점점 더 멀어지는 사이도 있다.
어쩌면 명절은 지금의 상태가 어떻든 다시 부모와 자식이 가까워지는 시간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선물 같은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서운한 것은 잠시 묻어두고 명절만큼은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들 속에 잊고 지냈던 감사한 기억들을 다시 한 번 꺼내보자. 오랜만에 찾아온 기나긴 연휴,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추석이 되면 좋겠다.
[잠언10:1]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잠언15:20]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잠언23:24]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잠언29:3]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와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느니라
[요한복음 19:26-27]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