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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 Sep 15. 2023

세상의 필요와 나의 꿈이 만나는 곳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과 자신의 재능이 교차하는 곳에 당신의 천직이 있습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벨리 댄스를 처음 배울 때부터 목표였던 공연이 끝났다. 평소의 나였다면 목표를 이뤘으니 이제 흥미를 잃어버리고 다른 걸 찾아 새롭게 시작했을 거다. 그런데 웬일인지 목표를 이루고 나서도 학원에 계속 나가고 싶었다. 무대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차마 영상을 못 보겠을 정도로 엉망이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연습했더라면 더 잘했을 텐데...’라는 생각도 컸다. 아무튼 그만두지 않고 계속 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같이 공연을 했던 언니는 잠깐 쉬고 오겠다며 그날 이후 학원에 나오지 않았다. 공연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공연 전부터 이미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저녁 성인반에는 나 밖에 없었다. 개인 교습을 받는 것처럼 자세하게 배우고 자세 교정도 받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미안하기도 했다. ‘나 한 명 때문에 수업을 하느라 불편하지 않으려나? 차라리 나도 안 나오면 그 시간에 쉴 수라도 있고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안 나오시면 저 혼자라도 열어 놓고 연습이라도 할 거예요. 한 분이라도 오셔서 얼마나 다행인데요. 빠지지 말고 꼭 와주세요.”

선생님의 말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거짓말은 아닌 것 아닌 것 같았다. 그냥 하는 말이라기에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도 밝고 진심이 담겨 보였다. 선생님의 말을 믿고 하루도 안 빠지고 계속 다녔는데, 슬슬 걱정이 들었다.

‘이렇게 수강생이 없는데, 월세는 제대로 낼 수 있을까?’

아무리 시장 입구의 허름한 건물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월세와 유지비가 들 텐데... 수강생이라고는 초등학생 몇 명과 성인 하나뿐인데 운영이 될까 싶었다.

‘월세 낼 돈이 없어서 문 닫으면 어떡하지?’

하루아침에 갑자기 문 닫고 없어진 학원을 이미 경험해 봤기에, 이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될 까봐 걱정스러웠다. 집에서의 거리나 선생님의 가르치는 스타일, 비용 등이 모두 딱 맞는 곳인데, 폐업이라도 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혹시 건물주 딸인가?”

가끔 선생님의 어머니가 학원에 들러서 청소도 하고 관리도 해주는 것 같았다. 건물주 딸이라서 월세를 낼 필요가 없는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운영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물어봤다.

“전 이게 천직인 것 같아요. 다른 일은 생각할 수도 없고요.
지금은 좀 힘들지만 점점 나아지겠지요.”

건물주의 딸이 아니라 문화센터 등 외부 강습을 나가서 부족한 돈을 번다고 했다. 가끔 공연을 해서 받는 비용도 학원 운영에 보탠단다. 미안한 마음은 오히려 커졌지만 ‘학원 문을 닫고 사라질까 봐’라는 걱정은 사라졌다. 천직을 팽개치고 말도 없이 사라지는 일은 없겠지. 한편으로 부러웠다. 삼십 대 초반에 천직이라 믿는 일을 하고 있는 모습. 당장 돈이 안 되어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앞으로 잘 될 거라는 희망으로 즐겁게 일하는 모습이 너무도 부러웠다. 당시에 나는 일을 그만두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찾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뭘 좋아하는지도 몰라서 헤매고 있을 때였다.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이 이미 천직을 찾았고, 즐기고 있다는 게 어찌나 부럽던지... 크게 도움은 안 되겠지만 월세에 보탬이 되게 꼬박꼬박 나갔다. 그리고 다음 단계의 목표를 만들기로 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두 달 정도 지나자 새로운 학생이 왔다. 알고 보니 그전에 1년 넘게 다녔고 공연도 했던 분이란다. 어쩐지 동작이 좀 엉성하긴 해도 초보는 아닌 듯 보였다. 특히 활짝 웃으며 즐겁게 춤추는 모습이 부러웠다. 두 달 전 첫 공연에서 제일 아쉬웠던 게 3분 내내 얼어붙었던 제 표정이었으니까.

며칠 후 선생님은 연말, 즉 석 달 후에 또 공연이 있다고 발표했다. 지난번 공연은 선생님의 스승이 협회장으로 있는 협회 차원의 큰 공연이었던 반면 이번 공연은 우리 학원과 다른 학원, 두 곳만의 작은 공연이라고 한다. 장소도 서울의 큰 공연장이 아니라 우리 동네의 작은 곳이라 부담이 덜 할 거라며 이번에도 참가하라고 한다. 마침 새로 온 분과 함께 하면 될 것 같다고... 첫 공연의 아쉬움 때문에 꼭 한 번 더 하리라 마음먹었지만 이렇게 기회가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아니 이렇게 빨리 다시 기회가 온 것이 싫었다. 3개월 만에 어떻게 새로운 작품을 준비할 수 있을까? 첫 번째보다 짧아진 연습 기간에 두 번째 공연은 더 엉망이 될 것 같았다. 이번에는 패스하고 다음 기회에 참여하겠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런데 새로 온 분이 무척 공연이 하고 싶었나 보다. 그분 역시 1년 전의 첫 번째 공연이 너무 아쉬웠고, 두 번째 공연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동안 건강 문제로 쉬다가 좀 나아져서 다시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공연 일정이 잡혀서 어찌나 좋아하던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50대 중반이었고,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몰라 이번에 꼭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아무리 꼭 참여하고 싶어도 솔로 공연은 무리인지라 내가 함께 했으면 좋겠단다. 고민스러웠지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선생님의 설득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좀 더 예쁜 옷을 입자고 하신다. 화장도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아 지난번 ‘저승사자’와 같은 불상사는 없게 하겠다고. 

선생님의 약속을 믿기로 했다. 미리 사진을 찍어서 공연 포스터와 프로그램에도 우리를 올리겠다고 하신다. 짧은 연습 기간을 고려해 지난번보다 짧은 2분 30초의 곡을 골랐다. 게다가 1절과 2절이 반복되는 구성으로 안무를 짜서 가능한 쉽게 하기로 했다. 대신에 동작을 크게 하고 이번에는 정말 활짝 웃으면서 하기로 했다. 같이 하는 분이 워낙에 잘 웃는 분이라 나도 같이 활짝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3개월에 새 안무를 익히고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날이 추워지면서 연습을 가는 게 점점 귀찮아졌다. 먼저 같이 하자고 했던 분이 일이 바쁘다거나 몸이 아프다며 연습에 빠질 때는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가 많은 분이라 아무래도 박자를 맞추거나 안무를 외우는 게 좀 느렸다. 연습을 더 많이 해도 모자랄 판에 자꾸 빠지고, 자꾸 틀리니까 화가 났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본인이 너무 미안해하니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안무를 다 배웠다. 모니터링을 위해 영상을 찍기로 했다. 나는 안무를 다 외웠고 그분은 전혀 못 외웠기에 당연히 내가 훨씬 잘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영상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50대의 파트너였다. 동작만 본다면야 내가 틀리지 않고 잘 맞췄다. 하지만 굳은 얼굴로 내가 하고 있는 건 춤이 아니라 체조 같았다. 반면에 박자는 좀 놓치고 옆 사람을 보고 따라 하고 있긴 했지만 그분은 웃는 얼굴과 여유로운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아직 연습 중이야. 실제로 무대 위에서는 다를 거야’라고 변명했지만 연습할 때 없던 여유가 무대 위에서 갑자기 생길 리가... 연습할 때 여유로워야 무대에서도 여유로울 수 있다. 내 눈에 보이는 게 선생님의 눈에 안 보였을 리 없다. 선생님은 우리 둘에게 각각 다른 과제를 주었다. 파트너에게는 다음 시간까지 안무를 꼭 외워올 것. 그리고 내게는 안무를 신경 쓰지 말고 틀려도 괜찮으니 꼭 웃으면서 연습해 올 것.

평소에 웃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웃으며 춤추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두 번째 공연에서는 첫 번째 무대의 아쉬움을 떨칠 수 있을까?



                                               

그림 출처: https://medium.com/hsp-world/https-medium-com-hsp-world-the-dance-between-our-vocation-and-our-art-215351c2b3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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