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로하 Sep 12. 2023

댄스 머스트 고 온(Dance Must Go On)


긍정적 착각은 동기 부여에 매우 효과적이며 장기적으로 성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셀리 테일러(Shelley E. Taylor), UCLA(University of California, LA) 심리학과 교수


주문한 의상이 도착하고 소품을 준비하고 메이크업도 연습했다. 그제야 실감이 나면서 떨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벌써 떨리면 안 되는데...’

마음을 다잡고 마지막으로 확정된 안무를 연습했다. 다행히도 둘 다 안무는 모두 외웠다. 선생님은 이제 거울을 안 보고 해 보자고 했다. 당연히 실제 공연에서는 거울이 아닌 관객을 보면서 해야 하니 실제처럼 해보자는 거였다. 춤추는 내 모습을 보지 않고 벽을 보면서 춤추는 건 처음이었다. 뭐가 다를까 했는데, 처음 맞춰 본 것처럼 엉망이었다. 거울 없이 춤을 추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실제로는 오른쪽과 왼쪽이 바뀐 것이 없고, 그대로 하면 된다. 그런데 그녀와 나 둘 다 앞, 뒤, 왼쪽, 오른쪽이 모두 바뀐 것처럼 마구 헤맸다. 우리는 절망했지만 선생님은 예상했다는 듯 별거 아닌 것처럼 반응했다. 원래 그렇다며 몇 번 해보면 괜찮아질 거란다.

‘정말 괜찮아질까? 이제라도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친구들에게는 취소됐다고 오지 말라고 하는 게 무대에서 못해서 망신당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또 한 번 흔들렸다. 같이 춤을 추는 언니가 내 마음을 읽었나 보다. 그녀 또한 가족을 모두 초대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너무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그만둘 수 없다며 꼭 끝까지 함께 하자고 내 손을 꼬옥 잡았다. 그렇지.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지. 흔들렸던 마음을 다 잡고 함께 무대에 오르기로 약속했다. 일주일 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연습뿐. 학원이 끝난 뒤 집에서도 연습했다. 독무가 아니기에 매일 학원에 나와서 맞춰봤다. 선생님 말이 맞았다. 계속 연습하다 보니 뒤를 보고 하는 것도 차츰 좋아졌다. 

공연을 이틀 앞둔 날. 모든 게 익숙해졌다. 단 하나만 빼고. 음악이 시작되고 첫 안무를 시작할 때까지 떨리는 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음날은 우황청심환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공연 전날 마지막으로 맞춰보기로 했다. 메이크업도 최종적으로 해봐야 했다. 외출 후 집에 오니 오후 4시. 만나기로 한 7시 30분 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연습을 조금 하다가 피곤해서 잠깐 쉬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오고 있는 거죠?”

시계를 보니 7시 50분. 잠깐 쉰다는 게 잠이 들고 말았다. 깜짝 놀라서 허겁지겁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갔더니 5분 만에 도착했다. 선생님과 파트너는 잠이 덜 깬 내 얼굴을 보더니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공연을 하루 앞두고 잠수하는 줄 알았다고...

먼저 거울을 보고 맞춰봤다. 하나도 안 틀리고 잘 맞았다. 다음은 뒤돌아서 거울 없이 해봤다. 이번에도 틀린 것 없이 괜찮았다. 그래도 좀 아쉬워 몇 번 더 맞추고 싶었는데, 선생님은 이제 됐다며 연습은 그만하자고 했다. 대신에 메이크업을 연습해 보기로 했다. 저번에 선생님이 해줬을 때는 어색하기는 했지만, 정말 춤추는 사람같이 보여서 신기했다. 그런데 오늘은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그대로 따라 했는데, 거울 속에는 저승사자가 있었다. 워낙에 스모키 메이크업이나 진한 화장이 안 어울리는 얼굴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진한 화장을, 곰손인 내 손으로 했더니 정말 못 봐주겠다.

“음… 가까이서 보면 원래 그래요. 멀리서 보면 괜찮을 거예요.”

선생님은 그렇게 해야 관객들 눈에는 눈코입이 보이고 예뻐 보인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준비할 게 많으니 일찍 자고 일어나서, 오전에 만나기로 했다.



마침내 공연날, 예상외로 담담했다. 우황청심환은 필요 없겠다. 공연장에 도착해 보니 무대가 생각보다 많이 넓었다. 무대 동선과 순서 등을 체크하기 위해 의상과 메이크업 없이 1차 리허설을 했다. 30초 정도로 짧게 했는데도 서너 군데는 틀렸다. ‘어제는 완벽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냥 청심환을 먹을 걸 그랬나 보다. 연습을 하고 싶었지만 메이크업을 완성하고 다시 2차 리허설을 하기로 해서 시간이 없었다. 일단 메이크업을 마친 후에 맞춰보기로 했다. 눈화장을 하려고 브러시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쉐도우는 그렇다 쳐도 아이라인이나 눈썹은 도저히 못 붙일 것 같았다. 도움의 손길은 예상치도 못 했던 곳에 있었다. 엄마의 첫 공연을 응원하러 온 언니의 고등학생 딸이 엄마뿐 아니라 내 화장도 도와줬다. 다행히도 전날의 저승사자 같던 모습은 사라졌고, 그냥 좀 무섭게 화장을 한 ‘센 언니’ 정도로 보였다. 역시 내 곰손이 문제였던 거다.

화장을 마치고 2차 리허설을 하기 전에 언니의 딸 앞에서 맞춰 보기로 했다. 무대 울렁증이었던 걸까? 비상계단 구석에서 맞춰보니 안무도 다 기억나고 틀리지도 않고 잘만 되었다. 딸 역시 엄마 최고라며 박수를 쳐줬다. 다만 둘 다 너무 긴장돼 보인다며 좀 웃으란다. 화장도 무서운데 웃음기 없이 엄숙한 얼굴 때문에 너무 무서워 보인다나. 하지만 웃을 여유까지는 없었다. 안 틀리고 잘 맞춘 게 어딘가. 잘했다고 서로 격려하며 옷을 입고 무대로 갔다. 우리 외에 스무 팀 정도가 있었다. 화장을 하고 의상을 갖춰 입은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멋있어 보였다. 사실 우리와 한 팀만을 빼고는 대부분 프로 또는 준 프로급의 댄서들이었다. 그들과 비교하니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우리보다 춤을 잘 추는 건 너무나 당연했지만 또 다른 차이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여유롭고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라도 도망가는 게 낫지 않을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드레스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메이크업에 의상까지 갖춰 입고, 거기에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능숙하게 춤을 추는 댄서들. 정말 꿈꾸던 장면이었지만 나는 그 그림 속에 없었다. 도움을 받아 화장을 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너무 엉성했고, 저렴하게 구입한 의상도 초라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얼어붙은 얼굴과 겨우 순서만 맞는 춤. 멋진 춤을 추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싶었다.

본격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배가 나올까 봐 점심도 못 먹고 초콜릿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배는 고픈 줄도 몰랐지만 다리도 후들거리고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초콜릿을 좀 더 먹어봤지만 떨림은 진정되지 않았다. 순서가 다가올수록 떨림도 심해지는 것 같았다. 이러다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정신력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나 강의 등을 앞두고 떨릴 때마다 사용하던 ‘착각 요법’을 떠올렸다.

‘오늘 여기서 춤추는 사람 중에 내가 제일 잘 춰. 내가 제일 멋지고 예뻐. 지금 여기 있는 관객들은 모두 나를 보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야. 이제 나의 춤으로 그들을 쓰러트리자. 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해. 나는 춤을 위해 태어났고 무대 위에서 춤을 추다 죽을 거야.’

혹시라도 누가 내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면 정신이 나갔다고 혀를 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정말 시작도 하기 전에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다. 착각이 효과를 발휘했던 걸까? 떨림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우리 순서가 되고 무대에 올라갔다.


“엄마 파이팅!” 옆에서 떨고 있는 언니의 딸인가 보다. 덕분에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같이 웃고 긴장을 풀었다면 좋았겠지만 착각도 응원도 그 정도의 힘까지는 못 주었다. 조명이 켜지고 음악도 시작되었다. 우리의 춤은 샤비(Shaabi)라고 부르는 이집트 스타일의 춤이었다. 20세기 후반에 도시의 서민들이 길거리에서 추던 춤에서 유래된 장르로, 다른 전통 이집션 벨리 댄스와는 달리 신나는 음악에 맞게 빠르고 유쾌한 느낌으로 추는 춤이다. 원칙은 그렇지만 그날 우리가 굳은 얼굴로 췄던 샤비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마음만은 카이로(Cairo) 거리에서 군중에 둘러싸여 춤을 추는 스트리트 댄서와 같았다. 음악이 빨라지자 박자에 맞춰 박수 소리도 들리고 간간히 환호소리도 들렸다. 착한 관객들 같으니라고... 긴장도 점점 풀렸다. 얼굴도 풀리고 조금씩 웃음도 지었다. 아마도 내 평생 가장 길었던 3분이었을 거다. 착각의 힘이었을까? 착한 관객들의 응원의 힘이었을까? 다행히도 안무를 잊어버리지도, 중간에 주저앉지도 않고, 끝까지 춤을 춘 뒤 내려올 수 있었다. 대기실로 돌아오자 배고픔이 밀려왔다. 휴대폰도 울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올리는 사진과 영상이었다. 착한 관객들은 내 친구들과 언니의 가족들이었던 것 같다. 궁금한 맘에 사진을 몇 장 열어봤다. 어찌나 얼굴이 굳어 있던지... 뒤에는 좀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웃는 모습은 하나도 없었다. 뻣뻣한 몸은 또 어떻고. 긴장 가득한 동작이 사진으로도 느껴졌다. ‘안 본 눈 산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차마 영상은 못 보겠어서 열지도 않았다.

초콜릿을 좀 더 먹고 객석으로 친구들을 찾아갔다. 마침 마지막 순서로 댄서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서 관객들과 함께 춤을 즐기는 시간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즐겁게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나도 살짝 끼어서 같이 춤을 췄다. 무대 아래라서 그랬던 건지, 끝났다는 즐거움 때문이었는지, 친구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막춤을 추었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조명이 켜졌다. 분장한 얼굴을 가까이서 본 친구들은 처음에는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착한 친구들은 곧 너무 멋있었다며 쌍엄지를 들어줬다.

“너와 저 외국 댄서가 다른 거라곤 얼굴 표정 밖에 없던데 뭘. 다음에는 꼭 웃으면서 해.”

친구가 말하는 외국 댄서는 국제 대회에서 늘 1, 2등을 하는 프로 댄서였다. 우리나라에 워크숍과 공연을 하기 위해 이집트에서부터 왔다. 정말 착한 친구들이다. 덕분에 민망함과 민폐를 끼칠까 걱정, 두려움은 모두 사라졌고, 진심으로 활짝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첫 공연은 무사히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났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의 힘이 너무 컸던 걸까? 그 후로도 공연은 계속되었다.



그림 출처: https://www.superdrug.com/blog/tutorials/scary-halloween-makeup


이전 12화 성실의 아이콘, 무대에 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