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 뭐가 닿으면 어디서든 잘 수 있다
여행감독으로 전업한 뒤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체력이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해외에 그렇게 자주 나가면서 말짱할 수 있나?"라는 이야기다. 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철인이 된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되묻는다. 내가 정말 여행체력이 좋은 것일까?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할 때가 많다. 아마 여행에서 나를 본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맨날 픽픽 졸고 있는 모습을 보며.
물론 단체여행을 할 때는 개인여행을 할 때보다 되도록 에너지 비축형 여행을 하기는 한다. 비상상황에 대비해야 하고, 오늘만 여행할 게 아니니까. 기분 내면서 한 여행지에서 다 쏟아내고 오는 여행을 하지는 않는다.
여행의 피로는 집으로 가져오지 않고 여행지에서 풀고 오려고 애쓴다. 잠을 충분히 자서 그날의 피로는 그날 풀고 넘어가고. 기회가 되면 수시로 낮잠을 자서 재충전하고. 보조 배터리를 열심히 충전해 채워 놓듯.
여행지에서도 끝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경유지 여행 때는 소극적으로 움직인다(본여행에서 쓸 여행체력을 비축해 되어야 하니). ‘다음에 다시 올 이유만 찾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숙제를 남겨둔다. ‘다음에 각 잡고 제대로 보면 된다’는 생각으로 나중을 기약한다.
여행의 기술이란 별 거 없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고, 쌀 수 있을 때 싸두고, 잘 수 있을 때 자주면 된다(이 사소한 걸 소홀히 하면 문제가 생기곤 한다). 그렇게만 하면 여행을 일상처럼 할 수 있다. 규칙적이어야 지치지 않는다.
트레킹을 잘하는 사람은 체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헛힘 쓰지 않고 자기 페이스로 걷는 사람이다.
그래야 오래 걸을 수 있다. 나의 여행 체력 유지 비결도 바로 설렁설렁이다.
‘잠존감’이 높은 편이라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등에 뭐만 받쳐주면 비행기든 배든 기차든 버스든, 어디서든 잘 수 있다. 자다 깬 뒤에도 큰 노력 없이 다시 잘 수 있다. 그래서 나랑 여행하는 사람 중에는 내가 조는 모습 사진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시차 적응도 부담 없다. 졸리면 자고 잠 안 오면 일하면 된다. 나인 투 식스로 일하고 출퇴근할 것도 아닌데, 언제 자고 언제 깨는 게 중요하지 않으니 시차를 '극복'하지 않고 시차에 '순응'한다. 지금도 자정이 좀 넘은 시간에 일어난 것이지만, 긴긴밤 그냥 일하면 된다.
잠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졸리면 일단 자고 본다. 잠을 참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일단 자고 일어나서 속도를 내기로 한다. 내일의 걱정은 내일 하기로 하고. 대지를 움켜쥐듯 달릴 수 있는 사자가 초원에서 낮잠을 자듯이.
고등학교 때는 자율학습 시간에 내내 졸았다. 팔이나 다리에 쥐가 나도록 제대로 졸았다. 앞자리가 전교 1등인데 키에 비해 어깨가 넓은 편인 친구여서 더 맘 편하게 졸았다. 그렇게 자고 나서 독서실에 가면 남은 잠을 잤고 집에 와서도 남은 잠을 잤다. 그래도 재수 안 하고 기특하게 단번에 대학에 갔다.
카투사로 입대하면 후반기 교육대에서 등급을 나누기 위해 영어 시험을 보는데 첫 시험 때 졸려서 자버렸다. 논산훈련소에서 카투사교육대로 새벽에 이동하느라 피곤해서. 덕분에 꼴찌반에 편성되어 교육대 시기를 우울하게 보냈다. 다행히 2차 시험에서 만회해서 극적으로 용산 주한미군사령부에 입성.
여행감독으로 여행을 이끌 때도 잠을 참지는 않는다. 저녁 먹고 이야기 한 순배 돌고 나면 몸이 스르르 녹아나는데 그러면 적당한 곳에 몸을 눕힌다. 그렇게 잠이 들면 한두 시에 깨곤 하는데 뻔뻔하게 처음부터 술자리를 지킨 사람처럼 끼어든다. 누구보다 쌩쌩하게.
안 되면 되는 거 해라,라는 철학에 맞춰 일이 안 풀리거나 꼬이면 일단 잠을 청한다(기운이 넘친다 싶으면 산책을 하기도 한다). 자고 일어나 '클났다'는 생각이 대뇌 피질을 스치면 비로소 집중이 된다.
시차에 적응하려 하지 않고 순응하면, 말똥말똥한 시간대가 온다. 밀린 일은 그때 하면 된다(지금이 바로 그 때다). 이때는 게으름 피우지 말고 집중해야 한다. 멍청할 땐 멍청해도 괜찮지만, 똑똑해야 할 땐 똑똑해야 한다.
아무리 먹어도 살 안 찌는 사람이 있듯이 아무리 자도 잘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여행감독으로서 별다른 자질은 없지만 ‘잠존감’ 덕분에 다소 무리한 스케줄을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것 같다. ‘계명구도’처럼 하찮은 재주가 인생에서 빛을 발할 때가 있다.
생각해보니 ‘잠존감’도 일종의 자존감이 아닐까 싶다. 지금 전전긍긍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한숨 자고 나서 다시 집중해서 들여다 보자,라는 애티튜드가 있어야 맘 편히 잠들 수 있으니까. 불안만큼 잠을 방해하는 것도 없고.
자정 갓 넘은 시간에 깨서 이 글을 쓰고 문득 ‘골치덩어리’ 서랍을 열어보니 여기 태자협의 첩첩산중처럼 끝이 없이 쌓여 있다. 글을 마치고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보려고 한다. 안 풀리면? 그냥 끊어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