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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둥지와 『롱다리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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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텅 비어진 아들의 책꽂이.

그 휑한 공간이, 칼바람 부는 매서운 겨울날 맨손으로 얼음을 만졌을 때처럼 아리도록 시리다.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햇살이 천천히 스며들며, 먼지 쌓인 책상 위의 몇 권의 책과, 벽에 걸린 포스터 위로 내려앉는다. 모든 것이 방의 주인을 기다리는 듯하다.


선글라스를 쓰고 민소매 차림에 팔짱을 낀 채 이두박근을 자랑하는 존 레넌의 포스터가 여전하다. 세월의 흔적으로 한쪽 귀퉁이는 접착제가 떨어져 돌돌 말려있고, 색도 바랬다. 아들이 있을 때는 이 방의 모든 물건들이 죄다 춤이라도 추듯 제멋대로 날아다녔다. 이제는 모든 것이 붙박이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코끝을 한껏 킁킁거려도, 더 이상 아들의 내음이 나지 않는다.

그렇구나. 이제 이 방의 주인은 더 이상 이 방의 물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


한 걸음 내디뎌, 방 안으로 들어선다. 책꽂이를 지키고 있는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유달리 좋아해 몇 번의 정리에도 끝끝내 살아남은 책들, 자잘한 잡동사니들, 모든 것이 아들을 기억하게 하는 조각들이다.


유치원 무렵 색연필로 그려 만들었던 작은 그림책을 집어 들었다. 아직 글씨 모양이 잡히지 않아 비뚤배뚤한 아들의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롱다리 그림책>』』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너는 유달리도 팔다리가 길었지...’


며칠 전 통화에, 아들은 새로운 단계의 삶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이제 정말 장성한 어른으로, 네 삶의 여정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구나…”

입술만 달싹거리며 혼자 말해 보았다.


얼굴에 태열이 오른 채, 신생아실에서 제일 큰 아이였던 그 순간부터 자라온 모든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엄마 엄마’ 부르며 갑자기 첫걸음을 떼던 순간, 술떡을 손에 들고 궁뎅이 춤을 추던 첫돌, 그리고....그 모든 날들.


중국 진나라에 왕술이라는 사람은 아들 왕탄지를 사랑하여 장성한 뒤에도 무릎에 앉게 하였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참 보기 흉한 모양새이다. 후대 선비들은 왕술의 이야기를 거론하며 절도 있는 자식 사랑을 강조하였다. 장성한 아들은 절도 있는 사랑으로 예의를 갖춰 인격적으로 대해야 할 가장 사랑하지만, 가장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지만 그분의 사랑이 언제나 아들과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빈방의 문을 조용히 닫는다. 그리고 내 삶의 다음 단계로의 여정으로 나도 발걸음을 가만히 옮긴다.


세상에 나를 부르는 수많은 이름.
딸, 동생, 아내, 후배, 선배, 선생님, 자매님, 며느리……

그 모든 이름 가운데
내 삶을 가장 지극하게 쏟아야 했던, 가장 무거웠던 이름, “엄마.”

그리고 그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환하게 불러주던 목소리,
“엄마아~~”

그 애틋하고도 찬란했던 한 순간의 기억이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따뜻하게 울린다.

Honker UltraTW.jpg

캐나다에서 자주 가던 공원에서 만난 오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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