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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과 Nov 18. 2024

나야, 이유식

엄마는 요리하는 또라이

안성재 쉐프가 따로 없다. 온도가 (익숙한 분유 온도인) 43도 언저리를 벗어나거나 입자감이 거슬리면 여지 없이 몸을 부르르 떨며 입 안에 넣었던 것들을 뱉어낸다. 그리고 나를 노려본다. 의도를 묻듯이.


아기가 태어난 지 6개월. 이유식을 시작한 뒤 매일매일 파인다이닝 쉐프에게 요리를 심사받는 기분이다. 얼마 전 요리 서바이벌 '흑백요리사'를 몰아보며 나는 유난히 탈락자들에게 감정이입을 했다(유행이 다 지나간 걸 안다. 애 엄마에게 유행의 첨단을 기대할 수는 없지요...) 아가재료의 익힘을 중시한다.


육아책을 보다가 삽화가 내 모습 같아 사진을 찍었다.


복병은 소고기였다. 이유식을 하는 이유는 사실 소고기를 먹이기 위한 것이다. 아기는 태어나 6개월이 되면 엄마 몸에서 받은 철분을 거의 소진한다. 이때쯤 철분을 보충해주지 않으면 빈혈이 올 수 있다. 철분이 부족한 아기는 잠을 자주 깨는 무시무시한 증상을 보인다. 당연히 성장에도 좋지 않다. 아기는 6개월이 되자 새벽에 2~3시간마다 깨며 나의 일상을 부숴놓았다. 제발 소고기를 먹자.


태어나 액체밖에 먹어본 일이 없는 아기에게 소고기는 너무 거칠고, 비리고, 단단할 것이다. 나도 안다. 머리로는 아는데... 유기농 식품 전문점에서 무항생제 한우를 사서 근막과 지방을 발라낸 뒤 살코기를 삶고(이 과정에서 육수에 떠오르는 불순물을 다 떠내고) 갈고 얼려뒀다가 끼니마다 데워 먹이려고 시도한 뒤, 아기의 거부로 고스란히 싱크대에 그것들을 쏟아 버리는 마음이란. 밤잠을 설친 상태로 음식을 만들고 먹이(려고 시도하)고 버리는 시간들. 겪어본 적 없는 허망함이었다. 엄마아빠는 항생제 듬뿍 미국산 소고기도 없어서 못 먹는다, 인마.


한 번은 이유식을 먹이던 중에 분노에 차서 그 길로 아이를 들쳐메고 소아과로 향했다. 역시나 소고기를 뱉어내는 아기 앞에서 '이건 뭔가 문제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어'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선생님, 애기가 무슨 짓을 해도 소고기를 안 먹어요." 잠옷 바지 차림으로 아기를 데려와 하소연 하는 내게 소아과 의사는 웃으며 말했다. "무슨 짓을 하면 안 되지요." 그렇지요... "아기가 음식을 먹는 게 즐거운 일이라는 걸 알려주세요."


그 뒤로 작전을 바꿨다. 이른바 디너쇼 전략. 한 숟가락 먹을 때마다 노래도 불러주고 춤도 추고 박수도 친다. 누가 볼까 무서운 각종 주접 끝에 이마에는 땀까지 맺힌다. 딸아, 재롱은 네가 엄마에게 떨어야 하는 거 아닐까. 이건 뭔가 반대로 된 것 같은데... 하지만 아기가 꿀꺽꿀꺽 이유식을 먹기 시작하자 뭐든 할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식을 시작한 지 한 달. 이제 아기의 먹성을 따라잡느라 버겁다. 이유식도 유행이 있어 요즘 대세는 '토핑 이유식'. 야채와 고기, 쌀죽 등을 각각 큐브 모양으로 얼려 각각 해동한 뒤 먹인다. 각 재료의 맛을 익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나는 한 달째 큐브 공장장으로 살고 있다. 이유식을 시작한다고 하자 어느 육아선배는 말했다. '이제 부엌데기 삶의 시작이구나.' 아뇨. 저는 요리도 하고 쇼도 하는 '요리하는 또라이'입니다.


이유식 한 상.


아기는 벌써 쌀죽, 오트밀죽, 밀가루죽, 소고기, 시금치, 비타민, 아욱, 애호박, 양배추, 단호박, 당근, 감자, 계란, 땅콩소스, 사과를 먹었다. 알레르기를 확인하려 한 재료를 3일씩 먹이고 다음 재료를 추가하는 식으로. 태어나 비타민이라는 야채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재료를 고르고 씻고 다듬고(애호박은 껍질과 씨를 바른다) 담고 얼리고... 이 정성으로 다른 뭔가를 했다면 일가를 이루지 않았을까. 고작 애 밥 먹이는 일에 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단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직장에서 일을 이렇게 열심히 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 정도 정성은 그 어떤 데도 쏟고 싶었던 적이 없지.


오직 너의 '첫'만이 나를 애쓰게 한다. 6개월 인생 처음 먹는 쌀. 네가 평생 먹을 쌀. 그런 것들이 나를 흥분시킨다. 30년 넘게 살며 무감해진 순간들, 예컨대 내게는 끼니를 떼우는 일 같은 것이 네게는 모두 처음이라서. 내가 덩달아 서툴고 긴장되고 설렌다.


사람들은 이래서 아기를 낳는 걸까? 행복의 한계효용을 리셋하려고. 인생을 낯설게 다시 살아보고 싶어서. 어느새 지겨워진 나 자신을 일깨우려고. 한 생명을 세상에 던져놓기엔 너무 이기적이고 자아가 비대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어쩔 수 없지. 이 모든 '첫'은 아기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할 테니. 나만이 만끽한다. 그 대신에 당분간은 요리하는 또라이로 살아야겠지만. 내일은 토마토를 먹어보자. 와. 태어나 처음 맛보는 토마토란 얼마나 달콤새콤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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