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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훈 Feb 02. 2022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무게

지휘자 귄터 반트

클래식 음악계는 일찍이 세계무대에 등장하여 성공가도를 달리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탁월한 실력으로 음악계에 데뷔하여 세계무대를 누비는 이들을 우리는 음악신동이라 부르지요. 그중 성인이 되어도 꾸준한 노력으로 거장으로 발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린 시절의 영광을 뒤로한 채 서서히 청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연주자들도 있습니다. 사실 클래식 음악계는 신동의 무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신체의 특성상 악기 연주자들은 보통 20세 전에 테크닉을 완성하기 위해 고된 노력을 합니다. 아무래도 악기 연주에 근육을 사용하기 때문에 성인이 돼서 테크닉을 습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 성악은 몸이 악기이다 보니 성숙되지 않은 어린 몸에서는 완숙된 소리를 기대하기가 힘들어 30대가 지나서 인정을 받는 성악가들도 많은 편입니다.


지휘자의 경우 신동의 탄생은 드문 편입니다. 어느 음악가들보다 더욱 음악적 완성을 요구하는 자리이다 보니 아무리 기술적인 면이 좋다 하여도 경험을 통해 무르익어가는 깊이 있는 음악을 어린 지휘자들에게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뀜에 따라 요즘 지휘자의 나이도 어려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미 20대의 나이에 베를린 필과 빈 필 등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정복한 1975년 생 다니엘 하딩, 1979년 생으로 23세의 나이에 벨기에 국립 교향악단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고 현재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인 미코 프랑크, 1981년 생으로 어린 나이에 지휘 천재로 인정받으며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정복하고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LA 필하모닉 음악감독 구스타보 두다멜, 그리고 1996년생인 클라우스 메켈레는 현재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젊은 지휘자로 이미 파리 오케스트라와 오슬로 필하모닉의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모두가 빠른 성공을 갈망하는 지금, 지금 소개하는 대기만성의 지휘자는 바쁜 인생의 달음박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성공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2001년 7월 독일 뤼벡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음악제,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노쇠한 한 노년의 지휘자가 다른 이의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등장합니다. 너무나 거동이 불편한 모습에 오늘 연주를 제대로 마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들게 할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연주곡은 연주시간만 60분이 넘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9번, 노 지휘자는 의자도 없는 포디움에 올라서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너무나 가냘픈 손에 들려 있는 지휘봉으로 허공을 가르며 음악을 시작합니다. 89세의 그의 육체는 너무나 연약했지만 음악을 지휘하는 그의 눈빛은 매서운 독수리의 눈매를 연상시켰고 그의 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음악의 힘은 듣는 이를 압도하고 남을 정도였습니다. 이 연주가 있은 후 7개월 후, 지휘자 귄터 반트는 영면의 시간으로 떠났습니다.


마지막 공연 모습 (2001)


1912년 생인 독일의 지휘자 귄터 반트(Gunter Wand, 1912~2002)는 그의 나이 70세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년배인 첼리비다케, 솔티 등이 이미 세계 음악계를 누비고 있을 때 그는 세상의 명예와는 상관없이 꾸준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비록 너무나 늦은 나이에 세상에 알려졌지만 26세에 쾰른 오페라 수석지휘자로 활동하였으며 33세에 쾰른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역임하는 등 그는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낸 음악가였습니다. 반트는 독일 교향악의 절대적인 귄위자로 인정받고 있는데 특히 그의 브루크너 해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귄터 반트는 타계하기 10년 전인 1990년부터 매년 뤼벡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음악제에서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과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을 연주하였고 당시의 실황을 담은 영상은 그를 기억하는 이들과 브루크너 교향곡에 대한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 (Anton Bruckner, 1824~1896)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곡을 쓴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브루크너의 9개의 교향곡들은 매우 장엄하면서 종교적인 숭고함을 담고 있는데 세상 영예와는 상관없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노 대가가 지휘하는 브루크너의 음악은 그 누구의 연주보다도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세상의 속도에 얽매이지 않았던 그의 삶은 무겁고 깊이 있는 음악으로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았습니다.  


2001년 7월 독일 뤼벡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음악제 브루크너 교향곡 제9번 실황 영상

https://youtu.be/Qvifq30zc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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