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예훈 Jan 24. 2022

고결한 음악의 성자(聖者)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음악가는 군인이 아니다."


파리 유학시절이었던 2005년, 세계 음악계는 한 사람의 부고에 술렁거렸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거장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Carlo Maria Giulini, 1914-2005)가 91세의 나이로 6월 14일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에서 타계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2004년 전설적인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세상을 떠났고 연이어 줄리니 마저 타계함으로써 진정한 거장 지휘자 시대의 폐막에 사람들은 충격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줄리니의 지휘를 처음 본 것은 예고 시절 이작 펄만과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VHS 영상에서였습니다. 당시 저는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있던 터라 이작 펄만의 바이올린 연주를 보기 위해 이 영상물을 보았지만 큰 키를 가진 귀족적인 외모와 에너지 넘치는 줄리니의 지휘에 더욱 매료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집에는 음반을 모으시던 아버지 덕분에 수많은 클래식 LP들이 있었는데 레코드 표지에서 보이는 줄리니는 훌륭한 지휘자의 모범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후 줄리니의 음악들을 접하며 그가 만들어내는 소리의 따뜻함을 느꼈고, 그 따뜻함의 원천이 고결한 그의 성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 겉모습만이 아닌 영적인 지휘자로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줄리니는 4세 때 떠돌이 악사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부모를 졸라 음악을 시작한 후 15세 때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해 비올라와 작곡, 지휘를 공부합니다. 졸업 후 그의 첫 직장은 음악원 부속의 아우그스테오 오케스트라의 말단 비올라 주자였는데 줄리니는 이 오디션에서 합격했을 때가 일생에서 가장 기쁜 때라고 말합니다. 그 후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로마가 해방되어 열린 기념 연주회에서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지휘자로 데뷔하였고 1946년 로마 방송 교향악단, 1950년 밀라노 방송 교향악단 음악감독, 1954년부터 56년까지 라 스칼라 오페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하였습니다. 그 후 1973년부터 3년간 빈 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로 일했으며 1978년부터 6년간 로스앤젤레스(LA) 필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했습니다. 특히 LA 필 시절 당시 25세의 정명훈을 부지휘자로 발탁해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정명훈도 줄리니를 자신의 진정한 스승으로 회고합니다.


줄리니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고결하고 덕망 높은 그의 성품 때문입니다. 줄리니의 오케스트라 통솔 방법은 권위주의적이 아니었으며 항상 단원들을 존중하고 사랑과 열정으로 음악을 만들어내려고 하였습니다. 스스로도 '음악가는 군인이 아니므로 강력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단원들과 인간적 교감을 달성하는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말합니다. 또한 가족을 위해서라면 음악도 버릴 수 있다고 말할 만큼 가족을 인생의 근본적인 가치로 여기며 실천에 옮기는 자상한 가장이었습니다. 1980년 아내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아내의 간호를 위해  LA필 상임지휘자 자리를 내려놓고 연주 활동을 극도로 제한했으며, 카라얀의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제안에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고 가족과의 시간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정중히 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인 정명훈을 위해 일부러 아프다는 이유로 자주 연주회 지휘봉을 정명훈에게 넘겼다는 일화는 유명하지요. 1982년 줄리니가 LA필을 데리고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공연을 하였는데 양일간의 연주회를 정명훈과 나누어 지휘하기도 하였습니다.

  

1982년 LA필 내한공연 입장권


줄리니의 음악은 정교한 구성력과 세련미, 그리고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서정미가 특징으로 많은 명반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LA필과의 브람스 교향곡 제2번, 빈 필과의 부르크너 교향곡 제9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의 베르디 “레퀴엠”, 시카고 심포니와의 말러 교향곡 9번 등이 역사적인 명반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오페라 음반으로는 서덜랜드, 슈바르츠코프와 공연한 모차르트의 “돈 지오바니”, 마리아 칼라스와 공연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도 빼놓을 수 없는 명연들입니다. 그리고 1997년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과 함께한 브루크너 교향곡 9번 리허설과 연주실황 DVD는 노구의 몸과 따뜻한 눈빛의 줄리니가 자상하게 단원들을 이끌면서도 곡의 대한 정확한 통찰력으로 감동적인 음악을 이끌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인생의 황혼에 들어선 노대가의 영적인 지휘와 음악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이전 12화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