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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ennyy Jul 30. 2020

스물여섯의 생일


생일



스물여섯의 생일마저 침대에 누워 보낼 수는 없다.


나는 아마 스물넷, 다섯의 생일도 내 작은 방에 누워 보냈던 것 같다. 아침엔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고, 내 방에 누워 친구들의 연락에 답을 하고 저녁엔 가족들과 치킨을 먹고.





장장 한 시간 반에 걸쳐 준비를 하고 밖에 나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인 것에 비해 주인공 같은 엄청난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라 좀 아쉬웠지만 아무렴 어떤가. 중요한 것은 내가 생일을 집에서만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집에서 15분 거리의 카페.


카페에 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더웠다. 어제까지는 비가 쏟아졌는데 오늘은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았다. 내가 태어난 날엔 비가 왔다고 하던데. 어쨌든 오늘은 구름이 예뻤다.








레이지 룸. 카페 이름이 꼭 내 방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마토 바질 에이드를 먹어보고 싶었는데 오늘은 팔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던 레몬 케이크가 있었다. 한 달 전부터 먹고 싶던 그 레몬 케이크가! 나를 위해 준비된 카페인가 싶었다.


카페에는 나와 편한 차림의 커플뿐이었다. 아 나 무슨 할 말 있었는데. 뭐 사랑해? 아니 그건 아닌데. 내가 듣고 싶어서. 웩. 생일은 난데 어쩐지 즐거운 건 다른 사람들이다. 누구든 행복하면 좋기는 하지, 그리고 내겐 레몬 케이크가 있다.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케이크 진열장 위의 초를 그제야 발견했다. 저걸 내 손으로 케이크 위에 꽂는다면 조금 청승맞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다 결국엔 노란색 초를 사버렸다. 사장님 저 오늘 생일이에요. 다행히 그 말은 잘 참았다.


초를 꽂고, 케이크와 커피를 이리저리 옮기며 사진을 찍고, 소원을 빌었다. 취업이 하고 싶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두 번째 소원은 조금 양심에 찔려서 급하게 추가했다.


돌아오는 길엔 로즈마리 화분을 샀다. 봉투에 넣어 팔목에 걸고 오는데 계속해서 향기가 올라왔다. 맛있는 레몬 케이크와 로즈마리만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생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 1등 당첨자가 나왔다는 복권 판매점을 지나쳤다. 그래도 나에게 1억이 있다면 내년 생일은 더 행복하지 않을까, 게다가 오늘은 내 생일이니 하늘이 도와 드라마틱한 사건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동으로 네 장, 수동으로 한 장을 샀다. 나는 시험 문제도 찍어서 맞춘 적이 드문 사람이다. 차라리 모든 복권 판매점에 걸려있는 ‘1등 당첨’ 현수막을 믿는 것이 낫다.






저녁은 해물 누룽지탕과 월남쌈. 탄수화물을 줄여야지 다짐했던 게 어제이지만 사람 마음은 원래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바뀌는 법이라고 했다. 내 취향대로 새우가 잔뜩 들어간 해물 누룽지탕을 먹으며 나중에 내가 이 맛을 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엄마 해물 누룽지탕 어떻게 해? 전화로 물어보더라도 나는 아마 전혀 다른 음식을 만들어내겠지.


저녁을 다 먹고 난 뒤 작년 생일과 다른 점을 찾아냈다. 소화가 되지 않는다. 나는 꼬박 한 해를 다 살았는데 나에게 남은 건 장기의 노화뿐이라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먹는 게 이렇게까지 억울할 일인가. 아니, 이런 억울함에 익숙해져 가는 게 나이를 먹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스물다섯 해가 지나도록 한 살 더 먹는 일이 낯설어 이렇게나 속이 더부룩한가 보다. 결국 에어컨 바람을 손으로 막아가며 불을 붙인 케이크는 촛불만 끄고 그대로 다시 냉장고로 들어갔다. 소원은 카페에서 빈 것에 "아까 산 로또가 당첨됐으면 좋겠어요"를 얹어 다시 빌었다.


다시 침대다. 창가에는 로즈메리 화분이 새롭게 들어왔고 비상금 봉투는 조금 더 두꺼워졌다.  서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작년 생일보다는 즐거웠던 것 같다. 언제부터 생일이 즐겁고도 서러운 날이 됐을까. 그때부터 머리가 굵어졌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년 생일은 조금 덜 억울하고 익숙하게 즐겁기만 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까.





그리고 결국 로또는 당첨되지 않았다. 다음 생일까지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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