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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ennyy Sep 21. 2020

치사율 90% vs 생존율 90%

강아지 홍역 확진에서 완치까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수의사 선생님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어느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홍역, 치사율 90%, 입원 불가능, 마음의 준비. 현실성 없는 단어들만이 정리되지 못한 채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꾸미가 우리 집에 온 지 정확히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꾸미가 이상했다. 첫 며칠은 낯설어하긴 했어도 건강해 보였는데 갑자기 노란 콧물을 계속 흘리면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감기인 줄 알고 콧물약을 받아와서 먹였고, 그래도 증상이 그대로여서 기관지염 치료도 받았다. 평소보다 체온이 조금 높은 것 같았지만 원래 강아지는 사람보다 따뜻한 편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날 병원 예약을 해놓았으니 내일 가서 물어보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희미하긴 하지만 홍역 양성 반응이 보이네요. 두줄이에요. 수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딱 두 마디만 던지고 나와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저 표정을 안다. 초등학생 때 엄마 손을 잡고 찾아갔던 아주 커다란 병원 의사에게서, 스무 살 때 만났던 남자친구에게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 사장님에게서 본 적이 있었다. '내가 지금부터 아주 안 좋은 소식을 전할 건데 어떻게 하면 너를 울리지 않고 잘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표정. 그제야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치료받으면 나을 수 있죠, 선생님? 그건 누가 들어도 제발 그렇다고 말해달라는 부탁이었지 질문이 아니었다.


'홍역은 치사율이 90%에 달하는 아주 치명적인 질병이고 전염성이 강해 입원도 시켜줄 수 없다. 입원이 가능한 전문 병원을 소개해드릴 수는 있으나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치료가 가능하다고 확답을 드릴 수도 없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 수의사 선생님은 본인도 아주 안타깝다는 말을 중간중간 끼워 넣으면서도 절망스러운 대답을 들려줬다. 함께한 지 열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제야 조금씩 곁을 내주는 것 같았는데 벌써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니 이럴 수는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젯밤 열이 나기 시작했을 때 바로 병원에 데리고 왔었더라면, 보호소에서 데리고 온 날 가능한 모든 검사를 해봤더라면, 꾸미를 데리고 오기 전 내가 더 공부를 해놨더라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정들은 이 상황이 전부 내 탓이라는 생각만 들게 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꾸미를 데려오는 바람에, 꾸미가 저 멀리 떠날 수도 있게 됐다. 결국엔 나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저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나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내 옆에서 엄마가 입을 열었다. 항혈청 주사를 계속해서 맞히고 잘 먹이면서 스스로 이겨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선생님의 말에 그럼 일단 그 주사부터 맞게 해 달라고 하는 엄마는 아까부터 울먹이고 있는 내가 민망해질 정도로 차분했다. 나는 울고 엄마는 차분한 이런 상황이 또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그때였다. 엄마 손을 잡고 아주 커다란 병원의 의사를 만났던 그때.


초등학생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의식이 희미해지는 발작에 시달렸다. 동네의 모든 병원을 전전하다 결국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갔다. 머리에 질퍽이는 무언가를 붙이고, 커다란 통에 들어가고, 별의별 검사를 다 해봤지만 결론은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약을 처방해 줄 수는 있지만 완치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엔 어떻게 됐냐고?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부지런히 서울의 병원을 오갔고 나는 딱 1년 만에 깔끔히 나아 오늘날 이 나라의 실업률에 일조하는 대졸 백수가 됐다.


차올랐던 눈물이 다시 들어가고 머리가 차가워졌다. 치사율이 90%라는 것은 홍역에 걸린 강아지 열 마리 중 아홉 마리가 죽는다는 뜻이지 꾸미도 이 병에 걸렸으니 반드시 죽는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꾸미는 살 수도 있었다. 살거나 죽거나,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그러니 꾸미가 살 확률은 50%다. 그리고 아까 양성반응이 '희미하게' 나왔다고 했으니 비교적 초기에 해당할 것이다. 60%로 봐야 한다. 카드의 한도와 통장의 잔액을 생각했다. 넉넉하진 않지만 꾸미의 치료비로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확률은 70%가 됐다. 그리고 꾸미는 상대적으로 튼튼한 시고르자브종이다. 다시 80%. 게다가 다행히도 나는 지금 백수다. 꾸미의 옆에서 24시간 간호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10% 더 얹어 꾸미가 살 확률은 90%가 됐다. 치사율도 생존율도 90%, 말도 안 되는 계산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야만 나도 꾸미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항혈청 주사를 맞히고 돌아와 온 집안을 에탄올로 닦아냈다. 다른 반려견이 또 있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을 듣고 왔지만 조금이라도 깨끗한 환경이 더 낫겠지 싶었다. 그리고는 몇 시간 동안 인터넷으로 홍역에 관련한 정보들을 찾아봤다. 대체적으로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깨끗하고 고온다습한 환경을 마련해줄 것, 사람 음식이든 뭐든 간에 강아지가 먹겠다고 하는 건 다 주면서 무조건 잘 먹일 것, 보호자가 마음을 단단히 먹을 것.


8월 초, 폭염과 폭우가 같이 온 여름이었다. 거실의 에어컨 바람조차 조심해야 하니 방문을 닫고 가습기를 틀어놓은 채  내 방에서 하루 종일 꾸미와 함께 있었다. 물수건으로 몸을 계속해서 닦아주고 배에는 쿨시트를 붙여 열을 내리려 노력했다.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꾸미는 자다가도 켁켁 거리며 깨기 일수였고 혹시라도 내가 잠든 사이 발작이라도 일으킬까 걱정되어 잠조차 잘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침에 나는 눈을 떴는데 꾸미는 그렇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도 밥은 잘 먹는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었는데 점점 식사량이 줄더니 아예 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소고기, 닭고기, 북엇국까지 그 어느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홍역은 몸에 항체가 생길 때까지 강아지가 버텨야만 이기는 싸움이다. 그러려면 밥을 잘 먹어야 했다. 대부분의 강아지들이 식사를 거부하다 몸이 약해져 홍역에게 지고 만다. 꾸미를 그렇게 되게 둘 수는 없었다. 영양캔을 물과 함께 갈아 주사기로 강제 급여를 해야 했다. 몸부림치는 꾸미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밥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언니가 미안해, 제발 먹어줘, 이거 먹어야 네가 살아. 하루에 다섯 번씩 그렇게 밥을 먹이고 나면 진이 다 빠졌다. 꾸미에게도 나에게도 힘든 시간이었다.


이래서 보호자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는 거구나 깨달았다.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은 죄책감, 꾸미가 당장 내일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하루 종일 아픈 강아지를 간호하는 것에서 오는 육체적인 피로감은 나를 약해지게 만들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냐면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하마터면 이때 너무 힘들어서 전남자친구에게 연락까지 할 뻔했다. 꾸미를 간호하면서 가장 아찔했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바로 그때라고 대답할 수 있다. 물론 연락은 하지 않았다. 다행히 힘들어도 사리분별은 할 수 있는 상태였다.




혈청 주사는 하루에 두 번씩 맞혔다. 혹시나 다른 강아지들과 마주칠까 봐 병원이 문 여는 시간과 닫는 시간에 맞춰서 갔다. 바들바들 떠는 꾸미를 끌어안고 한 시간 동안 주사를 맞히고 돌아오기를 일주일 넘게 반복했다. 이주 차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주사를 하루에 한 번으로 줄였고 삼주 차부터는 더 이상 맞히지 않고 상태를 지켜봤다. 다행히 꾸미는 식욕이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는 스스로 밥을 먹기 시작했고 콧물과 기침도 많이 잦아든 상태였다. 희망이 보였다.


홍역 확진 판정을 받은 지 한 달쯤 됐을 때 겉으로 보이는 모든 증상은 사라졌지만 아직 바이러스가 남아있을 수도 있어서 보다 정밀한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병원에서 혈액을 채취해서 연구소로 보내는 pcr 검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9월 14일, 꾸미는 드디어 홍역 음성 판정을 받았다. 수의사 선생님은 자신이 이 병원에서 근무한 이후로 홍역을 이겨낸 강아지는 처음 본다고 했다. 꿈만 같았다. 괜히 이름을 꾸미로 지어줘서 꿈처럼 허무하게 떠나가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꾸미는 꿈만 같은 기적을 보여줬다.






한 달 만에 잠 같은 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런데 침대에서 내려와 발을 바닥에 딛자마자 비명이 나왔다. 한 일주일 전부터 아파오던 발바닥이 이제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욱신거렸다. 조깅할 때 신겠다고 사놓았지만 단 한 번도 신지 않은 푹신한 런닝화를 신고 절뚝거리며 정형외과에 갔다. 역시 뭐든 사놓으면 어떻게든 쓸 데가 있다.


초면의 의사 선생님이 내 발을 이리저리 눌러보는 민망한 상황과 몇 장의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발 힘줄에 염증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젊은 사람에게는 잘 안 생기는 건데 혹시 요새 많이 걸었냐고 묻는 말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마 여름내 딱딱한 슬리퍼를 신고 꾸미의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느라 생겼구나 싶었다. 의사 선생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왜 많이 걸었냐고 또 물었고, 하필이면 본인도 개를 키우시는 듯했고, 호기심과 공감능력이 아주 많으신 듯했다. 결국 지난 한 달간 있었던 꾸미의 투병생활을 모두 말하고 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진료시간보다 꾸미 이야기를 한 시간이 더 길었다.


물리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오니 꾸미는 내 방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왼쪽 다리를 계속 떠는 모습이 영 이상했다. 불안한 마음에 급하게 꾸미를 깨웠는데 잠에서 깨고 나서도 계속 다리를 떨었다. 경련은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피해 갈 줄 알았던 홍역 후유증이 오고야 만 것이다. 이런 신경증상은 별다른 치료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침을 놓거나 항경련제를 투약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경련이나 발작이 더 심해질 수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다. 결국 평생 지켜보며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 엄지발가락을 꾹 눌러보던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치료가 길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염증이 한번 생긴 이상 잘 사라지지도 않을뿐더러 계속해서 관리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꾸미의 떨리는 다리를 보면서 아까 들은 의사 선생님의 그 말이 생각이 났다. 내 긴 치료가 다 끝날 때쯤이면 또다시 기적처럼 그 신경증상까지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들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았다. 나는 딱딱한 슬리퍼 대신 푹신한 런닝화를 신고 꾸미를 병원에 데려가면 되고, 꾸미는 홍역도 이겨냈으니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살았으니 됐다. 그거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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