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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ennyy Aug 18. 2020

개에게는 있는데 내게는 없는 것


어느 날 갑자기 깨달았다. 나는 꼬리가 없다. 그 당연한 사실을 굳이 깨닫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에 이제야 깨달았다고 대답하고 싶다. 내게 꼬리가 없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나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그건 그거대로 나름의 심각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나의 신체에 꼬리라는 부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소중한 반려견, 꾸미를 만나기 전까지는.




꾸미는 감정 표현이 크지 않은 편이다. 큰 소리를 내는 경우도 잘 없고 다른 강아지들처럼 웃지도 않는다. 그런 꾸미의 기분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눈빛만으로 통하기엔 우리는 아직 낯을 가리는 중이다. 지금 먹고 있는 사료는 어떻게 입에 좀 맞는지, 잠자리는 괜찮은지, 보호자로서의 나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지 궁금한 건 많지만 꾸미는 말이 없다. 혹시 구두 응답이 껄끄러워 그런 것이라면 서면으로 라도 회신 부탁드린다고 하고 싶을 정도로 우리 사이엔 소통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던 도중 꾸미가 집에 온 지 5일째 되던 날, 나는 마침내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꼬리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리 큰 동작도 아니었다. '흔들흔들'보다는 '살랑살랑'이 더 어울리는 움직임이었다. 꾸미의 꼬리를 살랑거리게 한 건 보호소에서 데려오던 날 동물병원에서 급하게 사 온 고무공이다. 누르면 삑삑 소리가 나는 것이 무서워 제대로 깨물지도 못하고 코로 툭툭 건드리기만 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표정은 마치 한 달째 분량이 늘어나지 않고 있는 졸업논문을 쓰던 때의 나처럼 심드렁하기만 했다. 변화 없는 표정과 살랑거리는 꼬리, 둘 중 어느 걸 믿어야 하는가. 꾸미는 지금 저 고무공을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으로 보고 있는 중일까 아니면 이딴 시시한 장난감 말고 다른 재밌는 걸 가져오라고 시위를 하는 중일까.




확신이 없을 땐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면 된다. 인터넷에 '강형욱 꼬리'를 검색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누군가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강아지의 꼬리는 사람의 심장과 같아서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다."라고 어느 방송에서 말한 장면이 나왔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어쩐지 로맨틱하게 들리는 말을 곱씹으며 살랑거리는 꾸미의 꼬리를 바라봤다. 고무공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면서 꼬리의 움직임도 조금씩 격해지고 있었다. 다행히 꾸미에게 저 공은 '이딴 시시한 장난감'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이었나 보다. 그런데 지금 움직이고 있는 저 꼬리가 자신의 통제 범위 밖이라면, 강아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솔직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숨김없이 자신을 내보이게 하는 무언가가 몸에 달려있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나는 그다지 솔직하지 못한 편이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즐겨하는 것은 또 아니다. 그저 아무 표현도 안 할 뿐이다.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그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의 감정을 물었을 때 나는 빙 돌려 말을 하거나, 상대방은 어떤지 되묻거나,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고는 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놓친 기회와 떠나보낸 사람이 한 트럭은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그런데도 내가 솔직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굳이 따지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꾸미의 흔들리는 꼬리를 보면서 가장 유력한 원인을 생각해냈다.


나에게는 꼬리가 없다. 아주 예쁜 검은 꼬리가 달려있는 꾸미도 고무공이 맘에 든다고 표현하는데 5일이나 걸렸다. 하물며 꼬리는 진즉에 사라지고 꼬리뼈만 남은 내가 솔직하기 위해선 더 오랜 기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강아지는 5일 만에 해낸 일을 너는 왜 26년째 하지 못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 개의 시간은 원래 사람보다 빠르게 흐르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을 항상 솔직하게 만드는 꼬리가 몸에 달려있는 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꼬리가 나에게 달려있다면 때로는 행운이고 때로는 불행일 것이다. 하지만 그 꼬리가 사랑스러운 반려견에게 달려있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축복인 것 같다. 보호소에서는 축 쳐져있던 꼬리가 언제부터인가 높이 서있는 걸 보았을 때, 그날 너를 데려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니까. 어쩌면 꾸미에게도 그 꼬리는 축복일 수 있겠다. 저 흔들거리는 꼬리를 본다면 누구든 고무공을 하나라도 더 갖다 주지 않고는 못 배길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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