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산문]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불안정한 환경에 놓인 아이들에게 의지로 이겨내라는 말처럼 가혹하고 무책임한 태도는 없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면 파렴치하고, 비슷한 환경을 극복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면 잔인하다. 한 인간이 세상과 마주하고 자기 밖의 세상 속으로 나아갈 때는 반드시 작용과 반작용, 인력과 척력이 함께 존재한다. 줄탁(啐啄)이 생명의 필수 조건이다. 밖에서 소용돌이가 치는데 내면이 고요하기 어렵다. 환경이 좋지 않은 아이들이 왜 공부에서 멀어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외부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할 수 없지만, 안정적인 환경은 바르게 성장하는 데에 꽤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바르게 성장했는지는 몰라도 어찌저찌 성인이 되었지만, 외부가 내면을 뒤흔드는 건 변함없다. 올해 읽은 책들은 제대로 ‘읽었다’고 하기 어렵다. 붕 떠 있는 것처럼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니, 글이 가슴을 때리지 못하고 뇌리를 스쳐서 나가버린다. 책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건 다른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간다.(그렇게 흘러가 버리는 게 때로는 자비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밖에서 태풍이 불어도 흔들림 없는 튼튼한 집처럼 강한 내면을 지닌 사람으로 길러내는 게 교육의 목표가 될 순 없을까? 요원해진 배움을 찾아서 평소에 읽지 않던 종류의 책을 읽는다. 어찌 보면 이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아 달라고 손을 내민 셈이다.
‘손을 잡아 주십시오. 지금 매우 혼란스럽고 불안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책이 손을 내민다. 어떤 손을 잡을지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 독서의 좋은 점이다.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에 책임 역시 독자에게 있다. 미지의 길로 걸어가 본다. 어떤 내용인지 미리 들춰보지 않는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아보지 않는다. 제목만 보고 선택한다.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제목의 책이 손을 내밀고 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어쩐지 별로 들어 보지도 못했고 해보지도 않았던 말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의심부터 불쑥 드는 말이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낯선 말이다. 내가 틀렸을 리 없다는 울퉁불퉁하고 못된 자아가 목구멍으로 쑥 올라온다. 그놈이 입을 벌리려 할 때 손을 내밀어 책을 덥석 잡는다. 책과 나는 그렇게 서로가 원해서 손을 잡았다.
책은 내용도 가르침도 가볍다. 피상적이다. 이 사람의 인생과 깨달음을 제대로 담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대학을 졸업하고 이삼 년 만에 대기업의 임원으로 살 수 있는지가 도리어 제일 먼저 궁금하다. 그렇게 큰 격차를 두고 뛰어난 인간이 있다는 얘기겠지. 의기소침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높은 자리를 내던지고 수도승이 되었다는 스토리는 어딘지 식상하다. 다른 사람의 한 번뿐인 인생과 그 엄청난 역정을 ‘식상하다’고 손쉽게 판단해 버린다. 책을 읽고 있을 뿐인데도 죄를 짓는다.
한 가지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눈을 감고, 들숨에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물이 차오른다고 상상하고, 날숨에 머리까지 찼던 물이 발끝까지 빠진다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호흡을 바로잡는 것만으로도 꽤 좋은 명상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바로 그 호흡을 잡아주는 실천적인 방법이다. 명상을 해본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 좋은 가이드다. 손을 잡고 출발선에 세워주는 셈이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일 때 한번 해보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책이 종장을 향해 가고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는 목숨을 잃어가면서까지 당신이 틀릴 수도 있다고 하는데도, 나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전히 마음은 붕 떠 있고 불안은 먼지처럼 부유한다.
천주교의 미사 중에 가슴을 두드리며 ‘내 탓이오’를 세 번 외는 시간을 나는 좋아했다. 모두가 자기 탓이라고 외치니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으리라. 형식적으로 행해지는 미사의 일부일지언정 어떤 효과가 있지 않겠나. 수도승이 암송하여 수행하듯 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일종의 수행일 테니까. ‘내 탓이오’를 세 번 외워 보았다.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한 번 더 세 번을 왼다. 별로다. 숨을 들이쉬며 발끝에서부터 물이 정수리까지 차오른다고 상상한다. 숨을 내쉬며 머리까지 찼던 물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다시 ‘내 탓이오’를 세 번 왼다.
내 몸이 종(鐘)이 된 것처럼 울려야 한다. ‘내 탓이오’ 가슴을 한 번 칠 때 거센 물결 같은 파동이 몸 안에서 진동하도록. ‘내 탓이오’ 가슴을 두 번 칠 때 진동이 몸을 울리도록. ‘내 큰 탓이로소이다’ 가슴을 세 번 칠 때 파동이 몸 밖으로 퍼져나가도록.
물에 빠진 종처럼 허덕이는 사이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간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당연한 말이 받아들여지기 어렵고, 내 탓이라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 세상이기에, 이 책의 제목은 매혹적이다.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손을 내민다. 일상에서는 흐트러진 호흡이 제자리를 찾기까지 훨씬 오래 걸리고, 한 번 마음에 묻은 미움과 분노는 없던 것처럼 깨끗이 지워지지 않는다. 얼룩덜룩한 건 나 자신이지 내가 미워하는 대상이 얼룩덜룩한 게 아니다. 그 사실을 ‘진짜로’ 깨닫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종이 되고, 얼마나 더 물을 채웠다 비워야 할지, 까마득하다.
(2024.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