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 죽음 / 스토너 / 생명 곁에 앉아있는 죽음
[에세이]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소설] 죽음.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 스토너. 존 윌리엄스.
[에세이] 생명 곁에 앉아있는 죽음. 이나가키 히데히로.
천수를 넘어서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보다 더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나의 최대의 근심은 ‘죽음’이다.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다. 살아있는 동안의 고통과 괴로움을 반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죽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것쯤은 참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언제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나 돌아보면, 이 우주에는 신도 사후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한 십 대 시절 어느 때부터였던 것 같다. 반대로 말하면, 신이나 사후세계가 있어서, 죽음 이후에도 이곳과는 다를지라도, 육신은 썩을지라도, 나의 기억이나 존재의 잔여물, 하다못해 찌꺼기 같은 흔적이라도 남는다면, 살아있는 지금의 ‘나’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어떠한 존재가 이어진다는 증거를 발견한다면, 나는 죽음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몇 번이나 유언장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계속해서 미루고만 있다. 단지 귀찮아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지만, 죽음을 상상하는 것이 두려운 건지도 모르겠다. 귀찮다는 건 어떤 일에서 도망칠 때 가장 간편한 변명거리니까.
죽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죽음을 인식할 때에만 인간은 진정으로 삶을 갈구하게 된다. 이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본 후에 남긴 한줄평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해 안전함만을 추구하는 삶도,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므로 어떻게 살든 문제없다는 식의 탈윤리적 삶도, 그 어느 쪽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가진 인식의 추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쉼 없이 양쪽으로 흔들린다. 그게 보통 사람들이 사는 방법이다.
죽음을 다루는 건 결국 삶을 다루는 거라는 말은 그래서 당연한 말인데, 우리는(아니, 내가 뭘 안다고 우리인가, 나는) 종종 그 당연한 말을 머릿속에서 싹 지우고 지나치게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삶을 막 대한다. 그래서 삶이 생각보다 엉망진창이 되는 거다. 유시민은 잘 살기 위해 죽음을 생각하라고 부드럽게 조언한다.
죽음을 가정하지 않는 삶은 없다. 삶은 한 번이라 소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러져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생명의 한살이가 허무하기 그지없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의 존재 이유는 유전자의 명령을 따라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기 위한 유전자 기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생명 곁에 앉아있는 죽음’을 읽으면서 한 가지 새로운 과학적 상식을 알게 됐다. 생명이 죽음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낸 이유가 세포를 완전히 새것으로 싹 갈아엎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더 깨끗하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유전자를 영원히 이어가기 위해 유전자의 가교인 세포들의 집합체, 생명은 죽는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서른두 종의 곤충과 동물을 다룬다. 이 생명체들이 얼마나 짧게 살다가 죽는지, 그 짧은 생애 동안 얼마나 열심히 번식 행위를 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진지한 일인지를, 꽤 부드럽고 편안하지만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았다.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하고픈 에세이다. 순 우리말을 사용하려는 역자의 노력이 돋보였는데, 오탈자나 비문이 눈에 띄었다.
스토너는 죽음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소설은 아니다. 윌리엄 스토너라는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리 많지 않은 분량 안에 담아낸다. 한 인간의 탄생에서 시작한 소설은 그 사람이 죽는 장면에서 끝난다. 정직하고 객관적인 형식이다. 이 소설을 죽음으로 엮어 함께 돌이켜보는 이유는 인간은 한 번 산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선택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한 번의 삶은 모든 선택의 결과인 고통과 후회, 환희와 행복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한 인간이 평생에 걸쳐 내리는 선택과 그 선택의 결과를 보는 것은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끔찍하기도 하다. 우리 각자의 삶이 모두 그러하다는 걸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죽음에 대해서는 한 줄만 써놓겠다. 이 소설은 죽음에 대한 가장 낮은 차원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얼른 다른 책을 읽고 싶어 진다. 그래서 한 권을 읽는 와중에 새로운 책 두세 권을 더 사서 쟁여놓는다. 어느 날 문득,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무리 많아도 만 권을 넘을 수 없겠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 허탈함이 습격했다. 만 권도 사실 좀 오버한 거고, 천 권 정도밖에 안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세상엔 책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맛볼 수 있는 감동에는 제한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거나 읽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더 잘 고르고, 후회 없을 선택을 하겠다는 결심. 죽음을 자각한 인간에게 나타나는 일종의 강박증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적어도 나의) 인식의 추는 저울질을 계속하고, 죽음의 자각 쪽을 향하던 저울추는 생활에 매몰되어 망각 쪽을 향해 있는 시간이 훨씬 긴 게 사실이다. 나는 곧 그저 재미있어 보이는 가벼운 소설책을 꺼내 들거나, 인생에 하등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쓸데없는 연예인 가십에 눈길을 주게 될 거다. 그러다 때때로 이 소중한 시간을 알차게 써야 한다고 갑자기 자신을 채찍질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흔들리며 앞으로도 조금 더 살아가는 거다.
유언장을 쓰지 못하고 죽게 될까 두려워하면서도, 유언장을 끝내 시작하지 못한다.
(2020.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