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의 속도

필사로 글씨를 심다

by 제주미진

손글씨는 느립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는 동안 마음이 머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허락합니다. 여유가 없을 때는 필사 시간이 더 길어지는 이유입니다.


글씨의 간격 모양을 조절하면서 생긴 속도가 감정의 온도를 드러냅니다. 여백까지도 저의 호흡을 보여줍니다.


손의 움직임, 사각 거리는 소리에 느끼는 종이의 질감, 필압까지 몸이 느낍니다. 몸을 움직이니 마음의 온도도 변화됩니다. 생각이 느려지고, 느려진 순간만큼 생각이 깊어집니다.


손으로 필사한 글에는 '나'의 흔적이 남습니다.


타이핑은 빠릅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데로 손이 움직이고, 수정이 쉽게 때문에 매우 정확하고 깔끔합니다. 빠르게 전개가 됩니다. 타이핑으로 하는 필사는 정제된 글자에 마음의 온도가 담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필사를 하는 이유는 글자를 단순히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필사를 통해 글의 씨앗을 심는 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씨앗을 심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많은 과정들, 심을 곳을 정하고, 흙을 만지고, 씨앗을 골라 싹을 틔우기에 가장 좋은 상황을 만듭니다. 필사가 쓰기를 위해 글의 씨앗을 심을 준비라고 생각되는 것이지요.


정성 들여 차근히 준비한 시간 동안 생각이 가라앉고 몰입할 수 있는 여백이 생깁니다.


손필사와 타이핑필사.


둘 다 글을 쓰는 행위이지만, 글을 대하는 마음의 속도와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저는 손끝의 속도가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손글씨 필사를 권합니다.


안도현 시인은 백석시를 필사한 일화로 유명합니다. 좋은 시를 반복해서 필사하고 외울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시인이지요. 시를 필사하며, 운율, 비유, 언어감각을 익혔다고 합니다. 시를 잘 쓰고 싶다면 시를 필사하면 됩니다.


김영하 작가는 글쓰기는 머리보다 손으로 하는 것이라 이야기하며, '손의 움직임'이 문장 리듬을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좋은 문장을 베껴보고, 문장을 따라 쓰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조언하지요. 실제 헤밍웨이와 카프카, 카뮈의 문장을 수십 번 읽고 베껴 쓰며 그 구조를 파악했다고 합니다.


윤태호 작가는 웹툰 작가지만, 이야기 구조를 잡기 위해 시나리오를 따라 써보았다고 합니다. 그림은 그릴 수 있지만, 좋은 이야기를 쓰는 능력이 중요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시나리오를 손으로 쓰면서 누가 말하는지, 왜 말하는지를 파악하면서 이야기의 구조와 대사를 분석해 온 것이지요.


글이든, 시든, 웹툰이든 '손으로 써보는 것'이 언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손으로 쓰면서 생각을 자연스럽게 정돈하고, 문장이 나를 기다려 주는 기다림 속에서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듭니다.


다른 사람의 문장을 손끝으로 따라 쓰면서 '나'의 글씨앗을 심고, 손끝으로 타인의 생각을 옮기며 '나'의 글 방향을 세워봅니다.


필사는 글쓰기의 시작이고, 글의 씨앗을 글씨로 심는 가장 오래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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