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연재 [글로벌 설득]
회의가 끝나고 나면 늘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할 말은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요한 얘기일수록 말문이 막혔다. 언제 끼어들어야 할지, 지금 이 말이 흐름을 깨지는 않을지 먼저 계산하게 됐다.
일은 잘하고 있었고, 맡은 일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는데, 회의실 안에서의 내 존재감은 갈수록 투명해지는 느낌이었다.
글로벌 비즈니스 현장에서 나는 이 장면을 반복해서 목격해 왔다.
실무 역량은 분명히 성장하고 있는데, 회의에서의 존재감은 오히려 희미해지는 것이다. 업무 이해도는 높아지고 책임 범위도 넓어지지만, 정작 중요한 논의 앞에서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묘한 불균형이 만들어진다.
실력은 쌓이는데, 존재감은 사라진다.
이 현상은 개인의 성향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역량을 갖춘 한국인 전문가가 ‘글로벌’이라는 전혀 다른 생태계에 진입하며 겪게 되는 소통 기준의 충돌에 가깝다.
같은 말, 다른 해석: 사라진 완충 지대
돌이켜보면 한국 조직에서 사용하던 소통 방식은 오직 ‘말’ 그 자체로만 작동하던 것이 아니었다. 평소 함께 일하며 쌓아온 정서적 유대, 업무에 임하는 태도에 대한 신뢰, 서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감각. 이런 ‘공유된 맥락’이 말과 말 사이를 자연스럽게 메워주는 완충 지대 역할을 해주었다. 동료들은 표현이 조금 투박하더라도 그 이면의 진심을 읽어주었고, ‘나’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 위에서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이 강력한 완충 지대가 작동할 기제가 현저히 부족하다. 지리적 거리로 인해 사적인 식사나 가벼운 만남을 통한 관계 쌓기가 어렵다. 동료들 역시 관계 형성에 있어 상당히 선택적이고 효율 중심적인 태도를 취한다. 서로의 정체성을 파악할 시간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은 채 말이 먼저 던져지고, 오직 논리와 구조만으로 메시지의 가치가 평가되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미국 근무 시절, 문제를 함께 풀고자 던졌던 나의 질문은 이 단절된 맥락의 틈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What’s wrong? How will you solve this problem?”
(무엇이 문제인가요? 어떻게 해결할 건가요?)
나에게는 협업을 위한 제안이었지만, 회의실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관계라는 완충 장치 없이 던져진 이 질문은 상대에게 ‘평가’이자 ‘질책’으로 해석되었다. “함께 고민해 봅시다”라는 뜻으로 던진 말은 맥락이 사라진 대화 속에서 “당신 이거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라는 취조에 가깝게 들렸던 것이다.
한국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던 대화 방식은 관계의 지지 기반이 사라진 글로벌 무대에서 나를 공격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지도 없이 안갯속을 걷는 이들에게
미국 근무 당시 커뮤니케이션 코칭을 받으며 나는 이 구조적 차이를 조금씩 자각하기 시작했다.
메시지가 해석되는 기준이 한국과 글로벌 환경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 말이 전달되는 방식보다 말이 해석되는 위치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깨달음에 닿았다. 소통의 본질은 유창한 표현력이 아니라, 말이 놓이는 지점과 상대의 판단 기준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있다는 점이었다.
많은 한국인 실무자와 리더들이 글로벌 미팅에서 비슷한 패턴을 반복한다.
할 말은 있지만, 언제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괜히 말을 했다가 흐름을 깰 것 같아 망설여진다.
용기 내어 질문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차갑다.
익숙했던 기준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환경에서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방향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조심스러워지고, 점차 침묵을 선택한다. 그렇게 회의의 중심에서 멀어지며 ‘조용하지만 일은 잘하는 사람’이라는 모호한 자리에 머물게 된다.
이 침묵은 당신의 역량 부족 때문이 아니다. 지도가 없는 상태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가 택한 하나의 생존 전략에 가깝다.
침묵이 시작되는 이유를 이해한다는 것
이 글은 더 유창하게 말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려는 글이 아니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왜 유능한 사람들이 글로벌 환경에서는 점점 말을 아끼게 되는지,
왜 실력과 존재감 사이에 이런 간극이 생기는지.
이 연재에서는 그 침묵이 개인의 성격이나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이 요구하는 소통 기준의 변화에서 비롯되었음을 하나씩 짚어보려 한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가 익숙하게 믿어왔던 ‘공기를 읽는 소통’이 글로벌 환경에서는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는지, 그 충돌의 지점을 함께 들여다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