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주마!

언니가 들려주는 글로벌 기업에서 일 잘하는 노하우

by 켈리황

미국 미시간에서 MBA를 마치고, 2007년 6월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화학회사에 첫 출근을 했다.


필라델피아는 펜실베니아 주에서 가장 큰 도 시다. 미국 동부에 위치해 있고, 바로 옆에 뉴저지 주가 있으며, 뉴욕은 차로 두 시간, 워싱턴 D.C.는 2시간 반 정도 걸린다. 필라델피아는 역사의 도시다. 그 유명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인디펜던스 홀과 자유의 종을 올드타운에 가면 볼 수 있다. 역사의 도시답게 도시를 다니다 보면 기념비나 동상을 종종 볼 수 있다. 다운타운에 있는 시청 꼭대기에는 펜실베니아 주를 만들고, 필라델피아라는 도시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윌리엄 펜 동상이 있다. 다운타운 어디를 가든 윌리엄 펜 동상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윌리엄 펜이 필라델피아라는 도시 이름을 만들었는데, 그리스어로 Brotherly love (형제의 사랑)이란 뜻이다. 도시의 별명이 City of brotherly love인데, 개인적으로 난 자유의 도시(City of Freedom)라고 부르고 싶다.

philadelphia.jpeg KM L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역사 깊은 도시지만, 필라델피아는 부유한 도시가 아니다. 곳곳에 슬럼 같은 위험한 곳이 있어서 차를 몰다가 등골이 서늘해졌고, 다운 타운에 살 때는 근처 슈퍼마켓 한인 주인이 흑인이 쏜 총에 맞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 위험 구역이 어디인지, 언제 어디를 피해 다녀야 하는지 파악했다.


위험한 걸 잘 피해 다니면 필라델피아는 꽤 살기 좋은 곳이 된다. 곳곳에 역사 유적지가 있어서 놀러 다니는 재미가 쏠쏠했고,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의 오케스트라는 이삼만 원이면 훌륭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레스토랑도 다양했는데, 가격도 저렴해서 친구들과 저녁이나 주말마다 좋다고 소문난 식당들을 찾아다녔다.


내게 필라델피아는 꽤 살만한 곳이었다. 미국에서 다니는 첫 회사는 어땠을까?


30살까지 한국에서 산 내게 MBA 직후 미국 회사 취직은 커다란 도전이었다. 모두의 예상대로 영어가 제일 힘들었다. 회의에 참석하면 반밖에 못 알아들어서 어느새 난 얌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못 알아들어도 남들이 웃으면 따라 웃고. 미국인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면 입은 먹고 웃는데만 썼다.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눈치는 늘고 자존감은 점점 바닥을 쳤다.


당시 나는 회사 MBA Rotation Program으로 입사했었다. 약 1년간 여러 부서의 프로젝트들을 하다가, 나를 원하는 부서에 채용되는 시스템이었다. 첫 프로젝트가 약에 들어가는 화학물질인 부형제 하나의 시장성을 조사하는 거였는데, 나름 잘했나 보다. 그 팀에서 6개월 후 글로벌 마케팅 포지션을 오퍼 받았다.


안 되는 영어로 열심히 회사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우리 팀 회의가 있었다. 상사인 마케팅 디렉터가 한 직원을 어떻게 자를지 얘기했다. 일을 잘 못해서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 팀원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속으로 놀란 두 가지는 그 직원은 내 옆자리 사람이었다는 것과 이 얘기를 그 사람 모르게 1년이나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 직원도 이 일을 알고 있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했다. 돌아보니 멍청한 질문이었지만, 그 때 난 그렇게 당황했었다. 다음 날 그 직원을 떠보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환하게 웃으며 새로 산 목걸이가 어떤지 내게 물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당사자는 전혀 눈치 못 채다가 하루아침에 잘릴 수 있구나.’라는 두려움은, ‘이 직장 사람들이 내 뒤에서 내 험담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의구심으로, 마지막으로 ‘내 상사를 절대로 믿을 수 없겠구나’라는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당시 내 영어는 유창하지 못해서, 미팅을 해도 벙어리였으니, 내가 일을 잘한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미국인도 저렇게 자르는데, 말도 잘 못하고 비자까지 지원해야 하는 외국인인 나도 언제든 자를 수 있겠구나 싶었다.


많이 괴로웠다. 회사 직원들은 드셌고, 나는 말을 못 했고, 자신감은 점점 없어졌다. 일을 못하면 해고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만 모르는 해고 얘기가 있을 수 있겠다 생각하니, 회사 사람들이 내 험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점점 더 두려워졌다.


32살의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회사 밖 여러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얘기해도 풀리지 않았다. 내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기도를 계속했다. 회사는 가기 싫었고, 사람들은 뒤에서 내 욕을 할 것만 같았고, 상사의 말은 어떤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미국에서 잘리면 난 어디로 가지? 한국에 돌아가서 직장은 제대로 구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은 '나는 언제 잘릴까?'라는 퇴사를 확신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3개월을 두려움의 지옥 속에 산 어느 날, 문득 내겐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 사는 것과 아무 걱정 없이 살다가 잘리면 그때 걱정하는 것. 3개월을 힘들어한 후라 더더욱 후자가 낫겠다 싶었다. 적어도 잘릴 때까지는 행복할 테니까. 그러다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아 몰라. 자르고 싶으면 자르라 그래. 난 나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마음이 너무 후련해졌다. 그리고 안 잘릴 수도 있지 않나?


난 그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며 3개월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고민하고 기도한 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고민하고 얻어낸 결론이니까. 이 일 이후로 일어나지 않은 일로 걱정하며 내 오늘을 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혹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때 가서 최선을 다해 해결하겠다고 결심했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오늘을 망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갑자기 회사 생활이 가벼워졌다.


그래 뒤에서 내 욕할 거면 얼마든지 해라. 자를 거면 얼마든지 잘라라. 난 내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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