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한국에서도 사람을 말할 때 '스위트하다'란 말을 자주 쓰곤 하는데, 호주에 살 때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 'sweet'란 단어를 참 많이도 들었다. 내게 스위트하다는 것은 달콤한 사탕에게만 적용되는 줄 알았는데, 호주 사람들은 자녀를 부를 때도 '스위티(sweetie)'라고 하고, 배우자나 연인에게도 그런 달콤한 호칭을 사용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 대신으로도 '스위트'을 사용한다. 사람에게 달콤하다고 하는 것은 약간은 로맨틱한 감정이 포함될 거라 짐작했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았고, 호주 사람들은 친절하고, 착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그 모두를 지칭해 '스위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어찌 되었건, 난 영어 모국어 사용자가 아니라 '스위트'에 대한 개념을 어슴프레 감으로만 잡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한국에 와서야 '스위트'의 의미를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시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한 '남해'는 여러 가지 특산품이 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섬초'라 불리는 시금치다. 시어머니께서 친구가 보내준 시금치라며 시금치 한 봉지를 나눠주셨는데, 신기하게도 시금치가 납작납작하니 옆으로 뻗은 통통한 시금치들이었다. 위로 자라야 할 시금치가 어찌 이리도 옆으로만 자랐을까 싶었는데 해풍에 도저히 위로 솟을 길이 없던 시금치들은 땅에 붙어 납작하게 자랄 수밖에 없는 처지라 했다. 그런데 시금치를 무쳐 한 입 맛을 보고는 해풍에 일어서지도 못한 시금치를 향한 내 안쓰러운 마음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시금치의 달기가 이리도 달 수 있을까. 스위트함이 극에 달한 시금치의 맛이었다. 사람들은 이 달콤한 시금치의 맛에 반해 일반 시금치보다도 훨씬 비싼 남해산 '섬초'를 굳이 구매한다. 사실 시금치를 먹으며 담에도 꼭 남해산 시금치를 사서 먹어야겠다는 결심만 다졌지, 시금치가 주는 스위트함의 의미는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시금치를 무쳐 먹을 때마다 감탄한 그 '스위트함'의 비결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런데 얼마 후 봄의 초입에만 맛볼 수 있는 '봄동'을 먹을 기회가 생겼다. 한국에서 겨울과 봄 사이를 처음 맞이한 남편은 '봄동'이 먹고 싶다며 마트에서 '봄동'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이름부터도 무언가 귀엽고 동그란데, 생긴 것도 마찬가지였다. 동글동글하니 피보나치수열을 연상케 하는 뺑그르르 동그랗게 둘러싼 잎들은 동글 납작하게 눌러 놓은 작은 배추 같았다. 집에 와 한 잎, 한 잎, 동그랗게 둘러 쌓인 잎들을 떼어 봄동 무침을 했는데, 소금과 액젓으로만 간을 한 봄동 무침의 달콤함은 남해 섬초를 먹었을 때 느낀 황홀한 스위트함이었다. 어떻게 과일도 아닌 야채가 이리도 달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남해 섬초나 봄동은 공통점이 있었다. 긴긴 추운 겨울을 이겨내었다는 것과, 옆으로 납작하게 땅에 붙어 자라났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가 그들이 가진 '스위트함'의 비결이었다.
물을 품고 있는 모든 식물은 영하의 날씨에 얼어붙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가능한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당분을 모두 끌어내어 농축시켜 추운 날씨에도 생존하기 위해 고투를 하고 있다. 그러다가 봄볕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멀리서 조금 비치는 그 봄볕을 온 힘을 다해 자신이 땅에 붙어 옆으로 넓게 퍼뜨려 놓은 잎으로 끌어 모을 것이다. 그렇게 모은 봄볕은 또 추운 하루를 견딜 당분이 될 것이고, 그 당분이 바로 그들이 가진 스위트함의 비결이었다. 남해 섬초나 봄동이나 그렇게도 위로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만 납작하게 자라는 이유는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겨울의 차가움 때문이었겠지만, 그런 장애물들은 그들의 생존 본능을 극대화시켰고, 그들이 생존을 위해 한 그 모든 일들이 스위트함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사람도 그런 사람들이, 남해 섬초와 봄동 같은 사람들이 스위트하다. 마음과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모진 시련이 닥칠 때, 내 몸의 당분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다가올 봄볕을 받기 위해 위로가 아니라 옆으로 나를 뻗치며 봄볕을 온몸으로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스위트하다.
나만 잘 살아 보겠다고 위로만 올라가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같이 잘 이겨내 보자는 마음으로 옆 사람의 손을 잡고, 또 손에 손을 잡으며 둥근 원을 만들어 가는 그런 사람들이 스위트하다.
시련이 닥쳐도, 도저히 위로 올라갈 방법이 없을 정도로 바람이 거세게 부는 곳에 서 있을 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내고, 견디기 위해 옆으로 단단하게 자랄 줄 아는 사람이 스위트하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스위트함을 나눠주고, 그래서 사람들은 스위트함을 한 번 맛보게 되면 그들을 다시 찾게 되고, 그런 사람들의 주변에는 그의 스위트함에 반한 사람들이 또다른 스위트함을 품고 해바라기 씨처럼 빼곡히 모이게 된다.
봄동을 한 입 베어 물고 그 스위트함에 웃음 짓는 사람들이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서로가 서로를 포개어 서로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된다. 스위트는 쓰디 쓴 모짐 속에 우리를 채우러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