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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매기 Jul 22. 2024

누가 엄마를 대신할 것인가?

매일 엄마에게 걸려오던 전화가 뜸해지고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왠지 평소보다 차갑고 쌀쌀맞게 들린다.


"엄마 왜 안 와? 대체 지금 어딘데?"

"엄마 이제 집에 못 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한테 전화해서 엄마 이제부터 집에 안 온다고 전해. 알겠지?"

"엄마 무슨 일 있어?"

"..."


하...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그동안 오매불망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다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자책할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그동안 아빠에게 한 거짓말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하고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혼자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빠의 꾸짖음보다 우리끼리 덩그러니 집에 버려져 있다는 사실이 훨씬 더 두려웠다.


나는 바로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한참을 횡설수설하다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빠는 어떤 설명도 듣지 않았지만 그냥 모든 걸 다 알겠다는 듯이 나의 우는소리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내 전화를 받고 이틀 만에 집에 돌아온 아빠는 엉망진창이 된 집안 곳곳을 치우고 한가득 장을 봐서 요리를 해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 따뜻한 집밥에 금세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 편안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빠는 다시 집을 떠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고, 우리를 돌봐줄 엄마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이때까지 아빠는 우리에게 살가운 애정표현 한번 제대로 안 해주던 무뚝뚝하고 불편한 존재였다. 하지만 확실한 건 엄마처럼 겉으로는 다정하지만 비겁하게 우리를 외면할 만큼 어리석거나 무책임하지 않았다. 그 시절 한창 젊은 30대 초반에 얼마나 망막하고 답답했을지 지금 내 나이 40이 다 되어가도 상상도 가지 않는다.


무너져 버릴 듯한 멘털을 혼자서 간신히 부여잡고 아빠는 처음으로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이제 우리끼리 살아야 되는데 동생들 잘 챙길 수 있겠느냐'라고 말이다. 나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냥 솔직히 아빠마저 우리를 떠날까 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조건 잘하겠다고 아빠를 안심시켰다.


아빠는 집에 머무는 동안 나에게 집안일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아빠에게 된장찌개와 부추전 레시피를 전수받았다. 밥을 지을 때 스뎅(스테인리스) 그릇을 밥솥에 넣어 계란찜을 만드는 기발한 노하우도 아빠한테 배웠다. 딸내미들 시집가기 전에 엄마들이 김장하는 법부터 다양한 살림 노하우를 전수해 주며 신부수업을 한다는데 나는 15살에 마스터했으니 일찍이도 신부수업을 마친 셈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몸살에 걸렸다. 온몸에 열이 펄펄 오르고, 힘이 하나도 없었다. 평소에 제대로 해보지도 않던 집안 살림을 어린 중학생이 한 번에 다 배워야 했으니 참 고단했을 만도 하다. 나는 사흘을 꼬박 앓다가 회복했고, 내가 누워있는 동안 아빠는 우리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없이 흐느껴 우셨다.


아빠가 다시 일을 하러 떠나던 날, 어린것들만 남겨두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던 아빠와는 달리 나는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가 더 편했던 것 같아. 아빠가 빨리 갔으면 좋겠다. 아빠만 없으면 이제부터 나한테 뭐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잖아!'


나는 저만치 철이 없고 뭣도 모르는 그냥 철부지 중학생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내가 어찌 동생들을 잘 보살피며 엄마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엄마가 집을 나갔다는 소문은 금세 온 집안에 퍼졌다. 저 마다 걱정을 가장한 뒷담화, 앞담화를 가리지 않고 해대기 시작했다. 식구라는 이름으로 듣기 싫은 엄마 욕을 대놓고 한 마디씩 내뱉으며 또다시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말로만 떠들어 대는 동정심일 뿐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고마운 분들도 있었다. 하루는 넷째 삼촌과 숙모가 양손 가득 학용품을 사들고 집에 찾아와서 밥을 해주고 가기도 했다. 그 후 한 달간은 친할머니께서 우리를 돌봐 주시기도 하셨다. 하지만 모두 각자 챙겨야 할 가족들이 있었고, 저 마저 사정과 생활이 있는 법이었다.


어미를 대신해서 남은 아이들을 위한 희생을 감수할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친엄마조차 마땅히 져야 할 희생이 싫어서 집을 나갔는데 누구에게 무얼 기대하겠는가?


자기 생활도 없이 자녀를 위해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쓰고 보살펴준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이다. 태어날 때부터 여자라는 이유로 그런 엄청난 희생을 감수할 용기와 책임감이 있을 리 만무하다.


내 몸 안에서 태어나 나의 젖을 먹고 내 살을 맞대 성장하고, 내 손으로 밥을 먹이고, 내 품에서 잠이 드는 아이를 향한 모성애는 후천적인 배움과도 같은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어느 순간 내 아이는 나의 살점과도 같고, 나의 분신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로지 자기 자신의 가엾은 면만 들여다보느라 아이의 인생을 망쳐 버리는 어미가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이다.


매우 당연하게 엄마의 부재는 어떤 식으로든 자녀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다. 나의 불행은 동생들을 보살펴야만 했던 고단한 첫째의 의무감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내 동생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엄청난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이었다.


나는 첫째라는 이유로 동생들을 위한 희생을 감수할 만큼 성숙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그저 참을성 없는 10대 소녀였다. 사실은 나도 사무칠 정도로 어른들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어른들이 부재한 집안에서 언제부턴가 동생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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