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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빛 한 조각'을 찾아가는 여행

이해인_햇빛일기

by 숨은괄호찾기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채영은 외투를 입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구불구불 지름길을 골라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무려 2시간 남짓 걸리는 퇴근길. 늘상 기대감에 배신당하면서도 '오늘은 앉아 갈 수 있으려나..'하는 그놈의 부질없는 기대를 또 해본다. 그녀의 눈앞을 주마등처럼 스치며 서서히 속도를 줄여가는 지하철 안이 웬지 휑해 보이는 것이, 자리가 있을 법도 한 느낌이 든다.


'치-이-익-!' 한껏 설레는 마음으로 멈춰선 지하철에 야심차게 올라탔지만, 훤한 지하철복도와는 달리 좌석은 이미 극명한 만석이다. 오늘도 역시나 설렘과 기대에 배신당한 것이 분하기도 하고, 늘상 당하는 자신이 무색하기도 하여 이내 뻘쭘해진다. 그녀는 내심 아닌척 하면서도 나름의 촉을 발동하여 가장 빨리 내릴 것 만 같은 누군가의 앞에 자리를 잡고 머리 위 손잡이를 잡아본다. 그리고는 역이 지나갈 수록 들이차는 사람들 덕에 손잡이 자리가 그나마 나은 자리가 되어간다.


어두컴컴한 터널속에서 창에 비추는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도 지루해, 하염없이 멍을 때리는 것도 지루해, 10초 가량 눈을 감은채 선 잠도 청해 보지만 그마저도 불편해 포기한다. 그녀는 마지못해 아침에 가방에 담아온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이해인의 햇빛 일기.


촌스럽게도 지하철에서 마저 멀미를 하는 저질체력인 채영에게 '시'라는 형식은 한 편 한 편 짧게 읽고, 눈을 감은 채 잠시 멀미기를 다스릴 수 있는 나름의 효율적인 형식의 글이다. 책장을 넘겨 마주한 첫 번째 시 '햇빛 향기'. 제목과 함께 그녀의 콧 속으로 '훅' 따사로움이 밀고 들어온다. 후각과 더불어 촉각까지 자극하는 저자의 표현력에 채영은 묘한 질투심을 느낀다. 동시에 수 년 전의 경험이 오버랩되며 알 수 없는 진부함과 묘한 반발감이 올라온다.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몇 해 전, 감사와 관련된 강연을 듣던 그녀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당시 채영은 일도 사람도 어려웠던 지옥같은 회사생활을 버텨내며 내적 분노와 냉소, 불평불만이 가득한 지극히 원초아적인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던 터였다. '감사할 일 따위 없는데 감사하라니!' 우러나지도 않는 감사를 한다는 것이 지극히 작위적이면서도 억지 감동을 강요받는 것만 같아 괜시리 뿔이 났다. '이 책도 그런 책인가?' 싶어 속으로는 방어막을 세우면서도, 손으로는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는 그녀이다. 마음속 한 켠에는 내심 이 책이 그녀 자신을 설득해 주기를,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사의 길로 인도해 줄 수 있기를 원하는 바람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소녀같은 순수함과 동글동글 온화한 단어들로 꿰어진 시 들을 읽고 있자니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의구심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사람의 마음속이 이렇게까지 따스함으로 가득찰 수 있다는게 정말 가능한 걸까?'

'피폐한 내 마음 속에도 이런 따스함이 한 줄기라고 남아 있기는 한건가? 아니, 내 안에도 이런 따스함이 있기는 했던가?'


처음에는 그녀 나름의 분명 이유가 있었던 냉소와 분노였지만 어느새인가 부터 그 목적을 잃은 채 그저 습관처럼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고 있을 뿐이다. 시에 비추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더더욱 대비됨을 느낀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그토록 어두움을 향해 있어야 했던 이유는 이렇게라도 어둠을 게워내고 나면, 깊은 내면 바닥 속 가라앉은 따스함의 조각들을 발견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몸부림이 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깨닫게 된다. 저자의 감사와 행복은 그 삶속에 행복이 늘 가득차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때로는 먼저 세상을 떠난이와의 추억속에서, 때로는 쥐가 나는 다리 통증에서도, 때로는 한껏 퍼부은 빗줄기 속에서도, 때로는 기억을 잃어가는 친구를 바라보면서도 그 사이 사이 숨어있는 한 줄기 빛들을 발견하며 소중하게 모으고 모아 그것을 의미있게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다른이에게 그와 같은 따스함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느새 날섰던 채영의 방어막은 자각하지 못한 채 스르르 녹아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덜컹거리는 지하철 속에서 시집과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 마음속 한 켠 꽁꽁 숨어있는, 분홍 꽃잎 흩날리는 봄날과 같은 추억속으로. 자신만의 따스한 빛 한조각이 스며들었던 순간들을 찾아서...


어느새 그녀는 작은 기억 속 정류장에 도착한다. 거실 창가, 가장 좋은 명당자리. 햇살 받으며 한껏 늘어진채 일광욕하던 고양이에게 다가가 얼굴을 부비던 그 때로. 햇빛 따스함을 품은 고양이의 체온이 부비대던 그녀의 뺨을 타고 전해오던 그 순간으로..








오늘 내가 가장 편안하고 안정된 기분을 느꼈던 0.1초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내 입가에 잠시라도 미소가 스쳐지나갔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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