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아지다사라지다 Jan 11. 2023

소원은 신중히 빌어야지

매일 너를 위해, 때로는 나를 위해

친한 친구와 통화하면서 내가 한참 육아가 힘들다는 내용의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것 말고는 나의 근황이 없었다.


그런데 친구가 갑자기 묻는다.


"너는 아기 가질 때 말이야. 그러니까 아이가 생기기 전에 말이지. 어떤 마음이었니?"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아... 음... 그때라면. 아 맞아. 난 기도 했었어. 아이가 나에게 와 달라고 기도 했었어."

"그래? 너 기도 했었구나."

"응... 진짜. 나 그랬었네."


난 부끄러워졌다. 졸다가 죽비로 등짝을 퍽 맞은 것 같았다.

빌고 기도해서 생긴 아긴데 키우는 게 힘들다고 투정이나 부리고.

친구의 질문 덕에 나는 마음이 부끄러워 대화의 주제를 돌렸던 기억이 난다.




난 분명 기도를 했었다.

친정은 제사를 안 지내서

이름도 성도 얼굴도 모르는 시할머니 제사에 가서 아이 하나 점지 해 달라고 빌었다.

아이를 주시기만 한다면 이 씨 가문의 번성을 위하여

이 한 몸 바치겠다고 공갈까지 쳤다.


그리고 기도가 이루어졌다.


어릴 때의 나는 비비지도 못할 정도로 곱절은 이쁜 아기가 나에게 왔다.

하지만 구강이 특별히 예민하여 아무거나 먹지 못한다.

이 부분 까지는 기도에 포함되지 않았다.




눈도 못 뜬 채 양수에 불어 있는 작은 생명체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나는 또 기도를 남발했다.

 

'평생 저에게 배당된 건강과 행복이 있다면 그것을 모두 남김없이 이 아이에게 주십시오.'


기가 막히게 그날부터 내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꼭 아프지 않아도 될 부위까지 아프고

가끔 손이 불에 데거나 뼈에 실금이 가는 것은 사은품 같은 거였다.

이것 역시 기도에 포함되지 않았다.


'아이가 우선 건강하되 저에게도 아이를 키울 수 있게끔 적당한 건강도 남겨 주십시오.'

정도로 해도 됐을 텐데


기도라는 건 굉장히 극적이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기도의 내용이 너무 장황하면

신께서 듣기에

다른 사람들의 기도들에 밀려서 후순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어쨌든 나는 기도를 드렸고, 신은 기도를 이루어주셨다.

그러니 그에 따른 후속적인 어려움이나 위기는 내가 감당할 몫이다.

물에 빠진 거 구해 놨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은 되지 않아야 한다.




최근 건강가정 상담센터의 교수님과 상담을 했다.

그녀는 내가 하는 이야기들을 유심히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요. 지금 하시는 말씀을 쭉 들어보면, 수진 씨보다는 아이가 항상 우선인 것 같네요.

무엇을 결정하거나 행동할 때 항상 아이 얘기를 먼저 하시네요.

왜 수진 씨 보다 아이가 우선이죠?"


"네? 그야... 당연히... 제가 낳았으니까요."


엄마가 돼서 자식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당연한 순리라고 생각했는데

교수님은 왜 저런 질문을 나에게 했을까.


당황스러운 질문에 나는 진부한 대답을 했지만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교수님이 나에게 그 질문을 왜 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상담 시간 내내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도를 신중히 하려 한다.

기도해야 될 일이 있어도, 한번 다시 곱씹어 생각해 보고

자력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일단 스스로 해 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제는 뭔가를 요청하는 기도가 아닌, 감사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오늘도 아이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지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아기를 웃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불어 나를 위한 기도도 해보려 한다.


'오늘도 제가 다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조금은 웃을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서를 쓰다 지쳐서 아직 못 죽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