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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지다사라지다 Feb 26. 2023

아직도 이혼할 자신은 없습니다만

알코올 중독과 가정 폭력이 남의 일이 아닐 때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 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 먹지


소야 신천희 작가님의 유명한 '술타령'이라는 시이다.

길을 지나는데 동네 호프집 유리문에 광고처럼 붙어 있다.

알코올 중독 남편과 결혼하기 전이었다면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글인데

이제는 비슷한 술타령만 봐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남편은 매일 저녁 식사 때 소주를 한 병씩 마신다.

결혼하기 전엔 몰랐다. 주말에만 만났기 때문에 데이트 겸 그날만 마시는 줄 알았다.

신혼 때는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에 소주 한 병이 있으면 내가 석 잔은 마셨다.

내가 먹은 만큼 남편이 먹는 술 양이 줄어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나를 흘겨보며 소주를 두 병 사 왔다.

그 이후로는 나는 술에 손을 대지 않는다.




술을 먹으면 화가 쉽게 나는 건지 몰랐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간성혼수라는 무서운 증상까지 나온다.

술에 중독될수록 분노 조절이 힘들다는 증상이었다.

술이라는 게 사람의 몸과 마음을 이토록 망가뜨린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거나 혹은 강력한 회유를 했겠지만

이제와 고쳐질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남편은 이미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부터 술에 중독되었고

30대 끝자락에 날 만나 결혼했다.

그가 나를 더 사랑했다면 술을 끊었을까? 혹은 줄였을까?

이미 나를 만나기 전 술과의 동거가 더 길었기 때문에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좀 더 현명했더라면, 결혼 이후에 중독 증상을 알았을 때

이혼을 했어야 했나 하는 자책도 한다.

갑자기 아기가 생겼고, 금쪽같은 아이가 세상에 짠 하고 나타난다면

남편의 술에 대한 사랑이 아기에게로 옮겨가 술과 좀 이별할 수 있으려나

라는 기대가 헛 된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참 슬펐다.


그와 술 간의 사이는 누구도 끊어 놓을 수 없는 끈끈한 사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에 하나뿐인 아이마저도 그 사이에 끼어들 순 없었다.

그래서 참 그간 외롭게 지냈다.

솔직히 정말 외로웠지만 나는 한 아이의 엄마이기에 외롭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집에서는 소주 한 병이지만, 밖에서 약속이 있는 날은 당연히

소주 네댓 병은 기본으로 마신다.

나는 아이를 재우고 간신히 잠에 들었는데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삑. 삑삑 삑... 띠디디디디.'


번호가 틀렸다는 경고음이 들린다.

한 번에 번호를 입력하지 못한다는 건 만취의 신호이다.

하... 잠이 깸과 동시에 다시 신경이 곤두섰다.


아이와 함께 지내는 안방 문 너머로 그의 휘청거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그는 그의 방으로 가서 정장을 벗을 것이다.


"쿵!! 와자작."


아마도 그는 바지를 벗다가 넘어졌고, 그 근처에 있는 물건이 몸에 눌려 부서졌을 것이다.

아 나도 진짜 피곤한데. 그래도 그가 다쳤나 가 봐야겠지 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가 안방 문을 박차고 등장했다.


"야. 너 내 와이파이 왜 부쉈냐?"

"... 뭐? 내가 그걸 왜?"

"야. 이리 와서 봐봐. 부서져 있잖아. 이 미친년이. 장난하냐?"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화도 안 나고 그냥 말문이 막힌다.

1분 전에 본인이 넘어져서 부서진 기계를 나보고 부수었다고 하니

이건 뭐 예측할 수도 없는 스토리라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막막했다.


정말 본인이 넘어진 것을 기억을 못 해서 진심으로 나에게 묻는 건지,

아니면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 화를 내기 위해 화를 내는 건지

둘 중 하나여야 한다면 차라리 후자이길 바랐다.

내 아이의 아빠가 이렇게 심각한 증상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하기 두려웠다.


내가 아무리 억울하다 항변해도 그는 화를 멈추지 못했다.

자신의 엉덩이에 짓눌려 안테나가 부러진 와이파이를 던졌고

나는 다치게 되었다.

피부 위로 몽그르르 솟는 피와 통증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정녕 술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건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새벽 세시 반. 곤히 잠들었던 아이는 잠이 깨서 눈을 비비며 나왔다.

그는 오구오구 내 새끼 쭈쭈쭈 하며 아이를 안아 들고 먼지구덩이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부서진 기계와 덩그러니 거실에 남겨진 나는

허망하고 당황스럽지만, 저 작은 아이를 보며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두렵지만 어미로서 꼭 해야 할 일이라 생각이 들었다.

112에 문자로 사건정황과 위치를 전송했다.

생각보다 답신은 빨랐다. 지금 출동하겠다는 문자 답변이 왔다.


십 분쯤 지났을까 누군가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나는 눈물을 대충 닦고 주섬주섬 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젊은 청년 경찰 두 분이 와 주셨다.

한 분은 나를 거실로 인도하여 상처와 정황을 파악하셨고

한 분은 남편의 방에 들어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방금까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온갖 욕설을 늘어놓던 그는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또박또박 매우 젠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이 시간에 왜 오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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