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특정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을 봤을 때 그 행동이 옳다/그르다고 판단하기 이전에 그 이유와 배경을 먼저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해하려는 생각의 회로가 자동화되었다.
이로 인해 늘 나는 '다르다'라는 언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오히려 나의 '다르다'라는 언어가 늘 가족 내에서 남편과의 다툼의 이유였다.
"그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라고!!"
남편은 늘 내가 종종 하는 '다르다'의 말을 벌써 9년째 살고 있지만 항상 힘들어한다.
그렇게 남편과의 대화, 전쟁이 끝나면 그제야 남들과 다른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왜 이렇게 유난히도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었을까.
'다름'의 가치를 모두가 생각하는 평균 이상으로 더 유난히 넓은 경계로 추구하게 되었을까.
돌아보니 사람 관계 문제에 대해서 늘 많이 고민했지만 매 순간 그런 상황을 당사자와 이야기 나누고 직면해 왔다. 그래서 큰 상처로 남는 일이 많이 없었다.
늘 사람. 관계는 어려웠지만 가슴속에 사무치고 고여있을 만한 어려움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늘 사람 문제는 큰 탈없이 지내왔다고 스스로의 삶을 긍정적으로 미화하며 살아왔다.
그게 내가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선택 방식이었다.
특정 누군가와 특정 사건이 나와 맞지 않았지만 그 사람도 나름에 이유가 있었고 그 외에는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안다고 아이러니한 모순을 늘 달고 살았다.
안 좋은 기억들도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내게도 부족한 부분이 있었고 어떤 지점들을 배우게 된 지점도 있었다. 그렇게 부정적 경험도 스스로 좋은 추억이었다 만드는 놀라운 상상하기의 능력이었다.
누군가는 내게 착해 빠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내게 왜 이렇게 이성적으로만 이야기하냐고 말한다.
이런 정 반대의 다양함이 공존하는 나도 결국 나였다.
다채로운 나를 스스로 많이 안아줘야지.
그런 나를 더 많이 사랑하고 아껴줘야지라고 다짐한다.
나를 둘러싼 관계들을 돌아보며
내 안의 나를 지키는 작은 울타리의 기준을 마련해 가기 위해 쓴 글이다.
나는 왜 이리도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사람에 대한 경계심의 울타리가 내겐 있진 않았다.
그런 걱정과 두려움의 울타리를 만들어주지 않으셨던 우리 부모님께 감사하다.
시골 엄마집에 내려가면 집 마당으로 과일이며 간식거리를 나눠주러 오시는 할머니/할아버지들이 계신다. 손자 손녀들 왔다며 집에 있는 소소한 음식들을 굳이 나눠주러 오신다. 우리 엄마 아빠가 그동안 살아오시면서 주변분들께 마음을 나눠주신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어머니집에 내려가도 마찬가지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의 용돈을 주신다. 다 어머니가 베푸신 사랑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감사하다.
부모님 덕분에 가슴속에 사랑하고 나누는 마음을 더 많이 품으며 살아올 수 있었구나를 깨달았다.
뒤늦게 나이가 40이 넘어서야 내 안의 사람. 관계의 기준을 다시 정해 본다.
지금껏 그 기준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큰 경계 없이 넓은 바운더리를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성장하지 못했던 나의 관계성과 관련된 내면 아이였다.
나와 함께하는 이들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런 환경을 제공하고 싶어서 작은 걸음마. 한걸음 한걸음을 떼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