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나가 알람브라 궁전을 대략 다섯 시간 동안 둘러본 뒤 호텔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그라나다에서의 마지막을 즐기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선다. 그라나다에서 해야 할 또 하나, 바로 타파스 투어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라나다에는 바에서 술 한 잔을 주문할 때마다 타파스 한 종류를 공짜로 제공해 주는 특이한 술 문화가 있다. 여러 바마다 자기 나름의 타파스를 제공하고 있어서 골목골목 특색 있는 바를 찾아다니며 맛보는 것을 타파스 투어라고 한다. 진짜 투어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술을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투어라 할 것이다.
※타파스(Tapas) : 스페인에서 식사 전이나 술안주로 간단히 먹는 소량의 음식을 말한다.
첫 번째 타파스 투어 EntreBrasas Granada
이 식당은 이베리코 스테이크로 유명한 곳이라 맥주를 두 잔 시키자 타파스로 이베리코 구이가 따라 나왔다. 타파스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늦은 점심으로 이베리코 스테이크도 1인분 따로 주문해서 맛보기로 했다.
역시 타파스보다는 스테이크가 맛있긴 했다.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미디엄으로 굽힌 고기의 맛은 촉촉하고 부드러웠고 입안에서 진한 육즙을 느낄 수 있어 최고라 할만했다. 맥주 세 잔과 스테이크까지 해서 23.2 유로 (약 3만 원)이었다.
첫 번째 타파스 투어는 성공적!
두 번째 타파스 투어 Restaurante Los Manueles
호텔 근처의 유명한 Los Diamantes로 갈 생각이었는데 초저녁인데도 엄청난 손님이 있었고 후기도 호불호가 많아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가 두 번째로 찾은 곳은 누에바 광장 옆에 있는 타파스 바 Los Manueles였다. 시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자주 지나쳤는데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구글 평점도 4.5점으로 괜찮은 편이라 가보자고 했다. 바깥 자리는 이미 만석이고 손님도 많았지만 겨우 바에 한 자리 끼여 앉을 수 있었다.
맥주 두 잔과 함께 짭짤한 닭찜 비슷한 타파스가 따라 나왔다. 맥주 맛도 좋았고 타파스도 푸짐하고 맛있었지만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는지 직원을 부르기도 힘들고 추가 주문도 어려워서 그냥 나와야 했다. 다음에는 어떤 타파스가 나올지 궁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맥주 두 잔에 4.9 유로 (약 6,400원), 중심가라 다른 곳보다 좀 비싼 것 같다.
세 번째 타파스 투어 Casa Encarna
이제는 제법 어둑어둑한 거리를 걸어갔다. 사실 가장 가보고 싶은 타파스 바가 저녁 8시 30분 오픈이라 그 시간까지는 있으려고 했는데 예정보다 일찍 나오는 바람에 삼십 분 정도 여유가 생겼다. 가는 길에 갈만한 데가 있을까 싶어서 검색을 해보니 딱 중간 지점에 적당한 곳이 보인다. 오픈 시간도 오후 8시로 지금 바로 가면 될 듯하다. 한국인 후기보다는 외국인 후기가 더 많고 평점도 역시 4.5점이다.
문을 연지 얼마 안 돼서 우리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벌써 손님이 한 팀 있었다. 맥주를 두 잔 주문하니 멸치보다 약간 큰 생선 튀김이 나왔다. 금방 튀겨서 뜨겁고 얇은 튀김옷이 바삭한 식감을 주고 짭조름한 맛에 맥주 안주로 딱이다. 가지고 간 튜브 고추장에 찍어 먹으니 맛이 일품이었다. 다음에 무슨 타파스가 나올지 몹시 궁금하지만 이제 곧 마지막 타파스 바가 문을 열 시간이다. 친절하고 맛있어서 다음 기회가 있다면 다시 오고 싶은 타파스 바였다.
맥주 두 잔에 4.4 유로 (약 5,700원)이다
네 번째 타파스 투어 La Pajuana
워낙 후기가 좋아서 여행 오기 전부터 그라나다에 가면 이 타파스 바에 꼭 가볼 생각이었다. 가게가 그리 크지 않아 늦게 가면 대기가 많다고 해서 오픈 시간에 맞춰서 가기로 했다. 때문에 앞의 가게도 맛있었지만 더 주문하지 않고 나와서 오늘의 메인 La Pajuana로 갔다.
오픈 시간 조금 전인데도 몇 명이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고 곧 가게 문이 열렸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으니 곧 만석이 된다. 우리도 바 자리에 앉았다.
맥주 두 잔을 주문하니 센스 있게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의 컵 코스트를 깔아주었다. 색이 진하고 맛도 진한 알람브라 생맥주가 서빙되었다. 스페인에 와서 먹어 본 맥주 중에 알람브라 맥주가 가장 맛이 있는 것 같다.
바 안 쪽에는 여러 명의 직원들이 주문을 받고 있었는데 그중 나이가 지긋한 주인인 듯한 남자분이 상당히 유쾌했다. 바쁜 와중에도 하나하나 서빙하며 설명을 해주었다. 다른 곳과 달리 세심한 배려가 눈에 띄었다. 일단 컵 코스트를 놓아주는 것부터 감동이었고 같은 일행이라도 두 잔을 시키면 타파스도 두 개가 제공되었다. 또한 주문과 동시에 조리되어 나오고 플레이팅도 예쁘게 해 준다. 후기가 왜 그렇게 좋은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구글 평점도 4.7점이었다.
다음 잔을 주문하니 다시 다른 타파스가 제공되었고 겉모양뿐 아니라 맛도 상당히 좋았다.
마지막 타파스 바의 단점이라면 한국인 후기가 많아서 인지 (외국인도 좀 있긴 하지만) 한국인 손님이 너무 많다는 것과 늦게 가면 많이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랄까. 해운대에 있는 술집에 가도 여기보다 외국인이 많을 것 같다. ㅋㅋ
북적북적 사람들이 많아시끄럽지만 오히려 이런 분위기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맥주 한 잔 하는 게 더 즐거운 것 같았다. 다음날이면 너무 좋았던 그라나다를 떠나 새로운 도시로 갈 예정이라 딸과 나는 하고 싶은 얘기가 더 많았다.
산 니콜라스 전망대의 기적 같았던 풍경, 알람브라 궁전을 보며 느꼈던 감정들, 유럽과 아랍이 뒤섞인 듯한 묘한 매력을 가진 거리의 모습... 그라나다라는, 오기 전까지는 잘 알지 못했던 이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은 아쉬움을 담아 또 한 모금의 맥주를 마신다. 하지만 내일 다시 우리가 만나게 될 말라가는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줄지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 네 잔에 8.8 유로 (약 11,400원), 거의 맥주 한 잔에 2.2 유로가 타파스 바의 공식 가격인 듯하다. 네 군데의 타파스 바를 갔고 이미 맥주도 많이 마셔서 이제는 호텔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아마 남편과 함께 온다면 한 열 군데정도는가지 않을까 싶다.만약 남편과다시 오게 된다면 아쉬웠던 세 번째 타파스 바에서는 몇 잔 더 마셔보고 싶다.
가볍게 한 잔을 하고은은하게우리의 등 뒤를 비춰주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호텔로돌아가는 길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감회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 춥지 않은 2월의 밤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 이 순간, 내일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만 없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