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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선 Jan 14. 2021

하마터면 포르투갈 1호가 될 뻔했다!

리스본 여행 두 번째 날 (1)


리스본에서의 이틀째 날이 밝았다. 여느 때와 같이 새벽 일찍 일어나 산책을 나간다. 어제 가 보지 못한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까지 올라가 볼 예정이다. 어스름한 새벽의 도시는 시간이 멈춘 듯한데 인적 없는 길을 노란 트램만이 홀로 달리고 있다. 마치 이상한 나라로 들어선 앨리스가 된 것 같이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르막길이 가팔랐지만 그런대로 걸어갈 만했다. 혹시 일출을 볼 수 있을까 살짝 기대가 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날씨가 흐린 것 같아 불안했지만 조금 기다리니 바다처럼 넓은 테주 강의 수평선 위로 붉은 해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아무도 없는 전망대 위에서 나만을 위해 펼쳐진 말도 안 되는 환상적인 일출 풍경에 가슴이 턱 막히는 감동이 느껴졌다.


벌써 열흘째 딸과 둘이서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저런 일도 많았지만 이제 남은 일정은 일주일 남짓, 마지막까지 알차고 즐겁게 여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해본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뒤로하고 호텔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설레는 내 마음만큼 가볍다.




오늘은 트램을 타고 30분 정도 가야 하는 벨렝 지구를 돌아보고 전망대 투어까지 할 생각이라 일정이 빡빡하다. 딸을 깨워 조식을 먹고 서둘러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쿵! 샤워를 마치고 욕조에서 나오려는 순간 욕조 바닥이 미끄러워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뭐든지 잡아 보려 했지만 허우적거리기만 했고 순식간에 욕조 모서리에 왼쪽 이마 부분을 심하게 부딪치고 말았다. 엄청나게 큰 소리에 딸은 놀라서 달려오고 나는 50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난 크기의 혹을 내 이마에서 볼 수 있었다. 아... 망했다. 너무 놀라고 창피하고 당황해서 아픈 줄도 몰랐다. 이틀 전 휴대폰을 잃어버려 난리 쳐놓고 또 이런 사고를 치다니...


놀란 딸은 병원에 가자며 나서고  난 일정도 바쁜데 그냥 좀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만류했다. 그렇지만 이마에 혹도 너무 크고 혹시 뇌진탕이 왔으면 어쩌냐고 걱정하는 딸 때문에 호텔 카운터에 물어서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 일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명성답게 병원은 아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언뜻 보아도 까마득한 계단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2월 말인데도 리스본은 초여름 같은 날씨였다. 걸어 올라갈 생각을 하니 벌써 막막하다.

 그냥 병원 가지 말까? 별로 아픈 거 같은데...

안돼! 엄마 머리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해!

알았어. 올라가 보자.

내리쬐는 햇빛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병원에 들어섰다.


산 호세 병원 입구


병원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무슨 공원에 온 줄 알았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나무들이 울창해 병원 입구가 어딘지 찾지 못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고서 겨우 병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병원 로비는 그리 넓지 않았고 환자와 보호자 여러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번호표를 뽑아야 하는지 기계가 있길래 (포르투갈어로 되어있어서...) 좀 헷갈렸지만 대충 눈치로 번호표를 뽑아 기다리다 우리 차례가 되었다.


접수를 봐주는 젊은 남자 직원은 친절하게 어떻게 왔는지 물어보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나는 옆에 앉아 있었고 딸은 병원 접수 직원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있었다.

샤워하다가 미끄러져서 욕조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다.

어디서 왔느냐? 한국에서 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직원들이 다급하게 빠른 대화를 나누더니 분위기가 어수선 해진다. 한 직원이 마스크를 갖다 주며 우리에게 쓰고 기다리라고 하였다.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난거지?


주위를 둘러보며 겁먹은 채 기다리는데 잠시 후 의사 한 명과 허리에 총기를 찬 덩치가 큰 보안직원이 와서는 병원 복도에 바리케이드와 노란 출입금지 테이프로 대피 라인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를 라인 안 쪽으로 데려갔다. 우리를 사이에 두고 앞뒤에 서서 비키라고 손짓하며 환자와 보호자들을 대피시켰다. 마치 우리가 무슨 바이러스가 된 것 같다.

뭔가 싸한데... 괜히 왔어. ㅠㅠㅠ

지금 간다고 해도 돌려보내 주지 않겠지...

직원들은 우리를 재촉해 병원 안쪽 외딴 진료실로 데려갔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2월 말, 대구 신천지로 인해 코로나가 가장 심했던 한국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경계를 받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선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이었고, 포르투갈은 아직까진 한 명의 확진자도 나오지 않은 터라 한국에서 온 여자 둘이 제 발로 병원에 왔으니 얼마나 긴장을 했을까. 포르투갈의 첫 번째 확진자가 이 병원에서 생긴 건가 싶어 비상이 걸렸던 것이다.


진료실에 우리만 남겨두고 직원은 나가버렸고 기다리는 동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놀라서인지 이마의 혹은 후끈후끈 열이 더 나는 것만 같았다.

별로 아프지 않은데 오지 말걸...

혹시라도 이마의 혹 때문에 열나면 리스본에서 격리되나?

그럼 정말 큰일인데...


마침내 찾아온 의료진이 우선 우리 두 사람의 체온을 재더니 (다행히 열은 없는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언제 출발했는지 리스본에 오기 전 어디 여행했는지 물어본다.

한국에서는 코로나 유행하기 전에 출발했다.

리스본 오기 전엔 스페인의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딸이 침착하게 대답을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도시를 거쳐 왔느냐?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말라가, 론다, 세비야를 거쳐 리스본에 어제 도착했다.

자세히 말하라고 해서 성심성의껏 대답을 했다.

그러면 로마에는 언제 갔다 왔느냐?

재작년에 갔다 왔는데... 그것까지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둘이서 갸웃거리다 로마엔 안 갔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시 어디 어디 갔는지 말해보라고 한다. 좀 짜증스러웠지만 딸이 다시 도시들을 말했는데 또 로마엔 언제 갔는지 물어본다.

아니 로마에는 안 갔다니까요!

좀 전에 로마에 갔었다고 하지 않았냐? 말라가 다음에...

우리가 언제? 이탈리아에는 간 적이 없다.

세비야 근교 론다에 갔다고 했지!

서로 답답해하며 한참을 실랑이를 하다 보니...

헐... 세비야 근처 론다를 로마로 알아들은 것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론다를 잘 모르는 건가? 하긴 이웃나라 소도시 이름을 모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제야 오해가 풀렸다.


스페인 론다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의사가 우리에게 물어본다.

그럼 도대체 병원에는 왜 왔느냐?  헐... 어이가 없었다.

욕실에서 넘어졌다고 아까 접수할 때 말했잖아!

이마의 혹을 보여주며 접수처에서 얘기했던 걸 다시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 탁구공만 한 혹이 안 보이는 걸까? 그제야 우리에게 다시 기다리라고 하고선 진료실을 나갔다. 이번엔 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는가 보다.


또 잠시를 기다리니 이번에는 인상이 좋아 보이는 여자 의사 선생님이 들어왔다. 다시 체온을 재려고 하길래 아까 쟀다고 정상이었다고 말했다. 혈압을 재고 벌써 세 번째 상황 설명과 이마의 혹을 보여준다. 이마의 혹을 만져보고 살펴보더니 어지럽거나 토했는지, 의식을 잃지는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렇지는 않다고 하니 그럼 괜찮다고 집에 가라고 한다.

네? 검사 같은 건 안 하나요? 무슨 연고라도 발라주던지...

정 불안하면 얼음찜질이나 열심히 해주면 돼.

우리나라 같았음 벌써 소변검사에 피검사, CT까지 찍었을 텐데 의사 소견만 달랑 말해주고는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과잉진료가 없어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걸까...  

참! 당신들은 집이 없으니 얼음팩이 없겠군. 하나 챙겨 줄게.

당황하고 불안해 보이는 우리가 좀 안타까웠는지 이마를 찜질할 얼음팩을 주며 의사 선생님이 위로를 해주었다.  

당신들이 잘못한 게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다만 지금 상황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것뿐이다.

차분히 말해주는 의사 선생님의 위로에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이마에 얼음팩을 대고 진료실을 나왔다.


수납하려고 갔더니 또 접수할 때와 같은 창구 직원이다.

130.7 유로 × 2명 이라고 써서 보여준다. 뭐?

이건  또 무슨... 이 병원이 우리랑 싸우자고 시비 거는 건가?

진료를 받은 사람은 한 명이고 나는 보호자로 따라왔다. 라고 딸이 따지자 그제야 미안하다며 1명으로 수정을 한다. 카드도 안된다고 해서 현금으로 1인분(?)만 결제하고 보험 서류 등을 받아서 몇 시간 만에 병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마스크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늦어버린 여행을 계속하러 길을 나섰다.


벨렝탑

어휴 하마터면 포르투갈 1호 확진자가 될 뻔했네!


이마의 혹은 여전히 그대로지만 마음은 편안해졌다. 눈앞에는 리스본의 아름다운 붉은 지붕들이 펼쳐져 있었고 우리에겐 새로운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Let's go! 가자! 벨렝 지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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