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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Dec 17. 2023

지하철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뭐가 웃기냐고? 지하철을 타고 갈 때,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전쟁같이 정신없는 출퇴근 시간은 물론 사람이 붐비지 않는 시간대의 모습이 은근히 재밌다. 특히 한적한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그 재밌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서서 가는 사람이나 앉아 가는 사람이나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뚫어져라 핸드폰을 보고 있다. 어쩌다 한 번씩 그런 모습을 보면 우습고 재밌다. 또 한편으로는 핸드폰이 없었으면 사람들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난다. 


책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게 고등학교 1학년 때다. 그때 만난 같은 반 친구 덕분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근 50여 년을 친구와 함께하고 있다. 그 친구는 그때 이미 많은 책을 읽었고 또 읽고 있었다. 서예도 수준급의 실력이었고, 바둑도 잘 두었다. 그 친구가 좋아하는 걸 그 당시 나는 전혀 할 줄 몰랐다. 친구는 틈날 때마다 책 읽기를 권했다. 그 덕분에 책을 읽기 시작해 지금까지 책을 가까이하고 있다. 그러니까 친구는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좋은 길을 가르쳐 준 셈이다. 그래서 늘 고마운 마음이다. 


요즘은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려본다. 그전에는 대부분 서점에서 사서 읽었다. 그렇게 하는 게 편하고 좋아서 책 읽는데 나름의 원칙이 되었다. 거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구나 단어가 나오면 줄을 치며 읽는 게 좋아서 그랬을 뿐이다. 그동안 읽은 책을 일일이 세워보지도 기록하지도 않았지만, 제법 많이 읽었다. 그 책들을 다 모았다면 정말 산처럼 쌓였을 것이다. 돈 주고 산 책들이라 다 가지고 있고 싶었지만, 정해진 책장 크기 때문에 다 소장할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까 몇 해에 한 번씩은 책들을 정리해야 했다. 그때마다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을 어렵게 고르고 고른 다음 나머지는 눈물을 머금고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로망 중의 하나가 널찍한 서재와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을 갖는 것이다. 가끔 영화에서 책들이 가득 꽂혀 있는 널찍하고 멋진 서재를 보면 참으로 부럽고 갖고 싶었다. 


정말 오래되었지만, 내 돈으로 산 첫 책과 두 번째 책을 또렷이 기억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 큰형의 생일선물로 처음 책을 샀다. 그 책의 제목은 “Love Story”였다. 그 당시 Love Story는 책은 물론이고 영화로도 개봉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부유한 집안의 아들 올리버와 이탈리아 이민 가정 출신의 제니가 신분 차이를 뛰어넘어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다. 


두 사람은 결혼하지만, 여주인공 제니가 백혈병으로 일찍 죽는 결말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울렸다. 남자 주인공 올리버가 했던 명대사는 그 당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랑은 절대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얼마 전, 남자 주인공이었던 라니언 오닐이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그것을 보면 그간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이 책을 샀을 때의 뿌듯했던 기분은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모아 산 책이라 형을 위한 선물이기에 앞서 책을 샀다는 그 자체가 대견하고 뿌듯했었다. 두 번째로 산 책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거기엔 웃기는 에피소드가 있어 더욱 또렷하게 기억한다. 형의 책을 사고 나서 얼마쯤 지난 뒤에 읽고 싶은 책을 사고 싶었다. 


처음 책을 샀던 동네 서점을 다시 찾았다. 책을 사야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어떤 책을 사야 할지는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무턱대고 서점에 가기는 했는데, 책장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수많은 책을 보면서 내 눈동자는 마냥 흔들리기만 했다.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몰라 책장 앞을 왔다 갔다만 하고 있으니까 서점 주인아저씨가 다가왔다. 주인아저씨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좋은 책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서점 안쪽에서 빨간색 표지의 얇은 책을 가져왔다. 표지에 제목이나 저자의 이름이 없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주인아저씨가 권한 책이니까 당연히 좋은 책일 것으로 생각했다. 책을 사서 집에 오자마자 기대와 설렘으로 책장을 펼쳤다. 그렇게 서너 페이지를 읽고 나서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그 책은 포르노 소설이었다. 서점 아저씨가 왜 그 책을 권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지만, 그 때문에 당황했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책을 다 읽었는지, 또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억에서 지워졌다. 하지만 그때의 순진했던 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3월부터 새로운 직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근무 여건은 나무랄 데가 없는데, 출퇴근 거리가 먼 게 흠이라면 흠이다. 출퇴근하기 위해 지하철 5호선 상일동역과 종점인 방화역을 오고 간다. 지금은 5호선이 하남시까지 연장되었지만, 이전에는 상일동역이 출발지였다. 그전 같았으면 종점에 타 종점까지 오가는 긴 여정이었다. 매일 대략 3시간 정도를 지하철 안에서 보낸다. 아침 출근 시간에는 자리 잡기가 쉽지 않지만, 어렵게 자리를 잡으면 일찍 일어난 보상으로 잠을 청하며 간다.



퇴근 때는 방화역에서 출발하니까 여유 있게 앉아서 간다. 매일 하는 출퇴근이니까, 그 긴 시간을 어떻게 하면 가치 있게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시간 반 동안 무엇을 할까? 남들처럼 핸드폰을 본다? 당연히 나도 핸드폰을 보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핸드폰을 보는 경우는 많지 않다. 포털에서 뉴스를 보는 정도라 핸드폰으로 긴 시간을 메울 순 없다. 이참에 이어폰을 끼고 영어 회화 공부를 해 볼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중에 떠오른 게 책 읽기였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딱 어울리는 게 역사소설이다. 학창 시절부터 역사를 좋아해서 그런지 역사소설을 무척 좋아한다. 평소에 즐겨 읽는 산문집과 함께 좋아하는 게 역사소설이다. 그런데 역사소설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책값을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다. 역사소설은 시리즈로 나오는 게 많다. 그것들을 다 사서 보려면 제법 돈이 들어간다.


그 해결책은 도서관에서 찾았다. 마침 사는 아파트 바로 옆에 도서관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다. 책을 사서 읽다 보니까 그동안은 도서관에 갈 일이 없었다. 생각난 김에 찾아보니 예전에 만들어 두었던 회원 카드가 다행히 책상 서랍에 그대로 있었다. 그 덕분에 요즘은 도서관을 무시로 드나든다. 읽는 책에 밑줄을 치고 싶은 좋은 문구나 단어가 있으면 노트에 옮겨 적으며 예전의 습관을 바꾸고 있다. 


방화역에서 지하철을 타면 곧바로 책을 펼쳐 든다. 좋아하는 역사소설이라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깊게 빠져든다. 가끔 고개와 어깨를 펴려고 잠시 책에서 눈을 떼 열차 안을 살핀다. 열차 안의 모습은 앞서 말한 것처럼 변하지 않는 똑같은 모습이다. 똑같은 그림을 늘 반복해서 보는 느낌이다. 서로 다른 얼굴에 서로 다른 옷을 입고 가는 목적지가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다들 핸드폰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가끔은 무엇을 그리 열심히 보는지 궁금해서 옆 사람의 핸드폰을 슬쩍 들여다볼 때가 있다. 정말 다양하다. 게임에 빠졌거나 유튜브를 본다. 또 어떤 이는 스포츠 중계방송이나 최신 뉴스를 보고 있다. 쇼핑을 즐기는 사람이 있고,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저마다 하고 싶은 걸 핸드폰으로 하는 셈이다. 


어쩌다 열차 안에서 책 읽는 사람을 본다. 그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르게 반갑고 끈끈한 동류의식이 느껴진다. 혼자 책을 보고 있으면 어떤 때는 나만 혼자 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열차 안에 빈자리가 많을 때, 책을 읽고 있으면 옆자리가 비어 있어도 사람들이 잘 앉지 않는다. 그럴 땐 사람들이 책 읽는 나를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하철 안에서 무얼 하던지 그건 개인의 자유이고 선택이다. 또 원하는 걸 하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다. 다만,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시간을 죽이고 있지는 않았으면 한다. 째깍째깍 흐르는 그 순간의 시간은 의식으로 느끼기도 전에 현재가 과거로 바뀐다. 또 예금처럼 모아두었던 미래가 순식간에 현재로 빠져나가 버린다. 흘러가는 시간은 누구도 붙잡을 수 없고, 또 되돌릴 수 없으니까 허투루 낭비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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