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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Jan 08. 2024

어쩌다 노인?

어찌어찌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노인이 되었다. 절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추호도 인정할 생각이 없지만 말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졸업장과 앨범을 가슴에 품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찍은 흑백의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이 있다. 사진 속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그때의 초등학생이 이제 노인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날의 기억이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생생한데 언제 이렇게 세월이 훌쩍 지나갔나 모르겠다. 


사전에서 노인(老人)을 찾아보면 ‘나이 들어 늙은 사람’이라고 나온다. 그럼, 나이를 얼마나 먹어야 노인인가. 생각난 김에 그 기준을 찾아보았다. 우리나라는 1981년에 노인복지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서 정한 노인의 기준이 65세다. 이렇게 법으로 대못을 박아놓았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노인이 되어버렸다. 하긴 노인이 된 기념으로 나라에서 준 어르신 교통카드를 넙죽 받았으니 노인을 부정할 수 없다.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보면 어쩌다가 이 나이가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밤이 오면 잠들고 아침에 눈을 떠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산 거밖에는 없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노인이 되기는 했지만, 분명한 건 내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노인이 다 그렇게 항변할 것이다. 그저 탓할 수 있는 건 그놈의 세월뿐이다. 


한창 젊었을 때, 심정적으로 느꼈던 노인의 기준이 있었다. 당연히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긴 했지만, 꼭 나이의 숫자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외형적으로 보이는 부분을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허리가 심하게 굽었거나 거동이 몹시 불편한 분, 머리카락이 지나간 세월에 시달려 하얗게 변한 분, 얼굴에는 모진 세월을 버텨내느라 깊은 골이 잔뜩 새겨진 분을 노인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흘러가는 세월이 두렵거나 아쉽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건 내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만고불변의 섭리라는 것을 진즉에 알았기 때문이다. 또 젊어서는 내 앞에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무한대라고 착각했다. 그런데 억지 춘향이 격으로 노인이라는 무거운 감투를 쓰고 보니까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하루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한주 한 달의 흐름도 그 시간의 길이를 제대로 느껴보기도 전에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월의 흐름을 애써 외면하려고 발버둥 친 적이 딱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군대 갈 때였다. 아이를 낳는 출산이 여성의 일생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크고 중대한 일인 것처럼 남자는 군대 가는 게 그에 못지않은 큰일이다. 요즘이야 복무기간이 18개월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 때는 고스란히 3년간 군대 생활을 했다. 대학 때 받은 교련 시간 덕분에 약간의 감면 혜택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 군대에 갈 때, 그건 친구들의 일이지 나에게 닥칠 일은 아닐 거라고 강하게 부정했었다. 그런 나의 착각을 깨뜨려주려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황당하게 군대에 갔다. 남들이 들으면 믿지 않겠지만, 해당 병무청의 사무착오로 입대 전날 느닷없이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입대했다. 전화를 받고 입대하기까지 서울, 대구, 경주를 거쳐 울산으로 간 약 20시간의 여정을 글로 쓰면 그럴싸한 단편소설이 한 권쯤 나올 것이다.


두 번째는 부모님이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부모님은 항상 내 곁에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나이 들어 친구 부모님 상가에 드나들면서도 내 부모님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했다. 나의 바람이 착각으로 변질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이 세상을 떠날 거란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근거와 배짱으로 그렇게 터무니없는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온몸으로 거부했던 그 일들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 되었고, 이젠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이 모든 일의 명백한 주범은 세월이다. 이놈의 세월이 범인인 걸 뻔히 알면서도 잡을 수가 없고, 설사 잡는다고 해도 순순히 자백하기는커녕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을 게 뻔하다. 


우리의 일상에서 환갑잔치가 사라진 지 꽤 오래되었다. 이젠 칠순이 되어도 예전처럼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이지 않는다. 그저 가족끼리 조용히 해외여행이나 다녀오면서 살아온 세월에 감사할 뿐이다. 그나마 팔순이 되어야 조촐하게 잔치를 벌이기도 하는데 이것도 조만간 흐지부지되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공공연히 백세시대라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신 분들에게는 공염불 같은 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백세시대라고 치면 노인의 기준인 65세는 이제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을 뿐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축구 경기로 치면 후반전이 시작되고 10분 정도 지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반전에 지고 있었다면 점수를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남은 시점이다. 그런데 노인이라고 부르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누가 나를 노인이라고 하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눈에는 쌍심지를 켤 게 분명하다. 요즘 6~70대 사람들을 보라.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노인이라고 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 많다. 


노인의 나이 기준을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법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노인의 기준이 필요하겠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는 그런 기준이 필요할까 싶다. 그럼, 누구를 노인이라고 해야 할까?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물리적인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늙었으면 노인이다. 아무리 나이가 적어도 건강이 부실하고, 생각과 의식이 시대에 뒤처져 있으면 노인이다. 


건강을 위해 하루 평균 최소 12,000보 이상을 걷는다.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는 일을 아직 하고 있고,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고 꾸준히 공부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려고 나름 애쓰고 있다. 자화자찬인지는 몰라도 이만하면 나는 아직 노인이 아니다. 아니 노인이기를 강력히 거부한다. 노사연 씨가 부른 ‘바램’이라는 노래가 있다. 노랫말 중에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부분이 가슴에 진하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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