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무더위가 가당치 않다. 여름이니까 더운 게 정상이지만, 해가 갈수록 더위의 정도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 먼 남의 나라 일 같기만 했던 지구온난화가 이젠 정말 발등의 불이 되었다. 절기로는 입추, 말복이 지나 9월에 접어들었는데도 더위의 기세는 좀처럼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무더위의 영향은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도라고 해서 피해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제주를 여러 번 다녀왔다. 몇 해 전에는 일주일 동안 혼자 제주에 머물면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제주에 가면 이젠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이다. 제주도에 볼거리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지만, 내 취향에 맞는 볼거리는 얼추 보았기 때문이다. 여행할 때 꼼꼼하게 계획 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번 제주 여행은 제주에서 보름살이 하는 가족을 보러 가는 짧은 일정이라 아무 생각 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다 보니 어디를 가야 할지 더 막막했다. 바다? 산? 계곡? 일단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지만, 오히려 그 더위 때문에 갈 만한 곳이 더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이런 날씨에는 에어컨을 틀어놓고 드라이브나 즐기는 게 최고이지 싶었다. 드라이브한다 해도 갈 곳은 정해야 했기에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1,100고지 습지가 눈에 들어왔다.
1,100고지라는 단어가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만큼 높은 곳이라 징그럽게 달라붙는 이 무더위를 떼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예상대로 멋지게 들어맞았다. 1,100고지로 올라갈수록 바깥 공기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만큼 시원했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내리면 에어컨 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자연의 바람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에어컨 바람이 설탕을 잔뜩 넣어 순간적으로 달콤함에 빠져드는 맛이라면, 자연의 바람은 기분 좋게 은근한 단맛이 오래가는 그런 맛이다. 1,100고지에서 만난 바람은 온몸은 물론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주었다. 1,100고지는 서귀포시 중문동과 제주시를 잇는 1,100 도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고지이다. 해발고도가 1,100m여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라산의 남쪽과 북쪽을 가르는 경계 역할을 한다.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공기인데도 산 아래에서 맡았던 공기와는 그 맛과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고지로 올라갈수록 시원함을 넘어 서늘함이 느껴졌다. 무더운 날씨에 축 늘어져 있던 몸 안의 세포들이 그 서늘함에 놀랐는지 피부에 오톨도톨 닭살이 돋았다. S자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는 드라이브는 무더운 여름날에 최고의 선택이었다.
1,100고지 주차장에는 차들이 제법 많았다. 무더위를 피해 찾은 사람들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지에 있는 팔각정의 내부는 편의점이었다. 이곳에서 시원한 냉커피를 뽑아 벤치에 앉아서 마시면 이만한 피서가 있을까 싶다. 팔각정 앞을 지나가는 도로 건너편에는 1,100고지 습지가 숨은 듯이 자리하고 있다.
고지 습지는 나무숲에 가려져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다. 다행히 습지 입구에 “제주 1,100고지 탐방안내소”가 있어 습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습지는 데크 길을 걸으며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다. 그런데 데크 길을 걸으면서 눈길은 발아래 습지가 아닌 하늘로 향했다.
파란 하늘은 가을이 온 것처럼 저 멀리 높게 물러나 있다. 그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구름이 제멋에 겨운 듯이 펼쳐졌다. 때때로 모양을 바꾸는 구름은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보였다. 국군의 날 흰 연기를 내뿜으며 축하 비행을 하는 전투기가 방금 지나간 것처럼 선명하게 하늘을 가르는 구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뭇가지 끝에 걸린 구름은 나뭇가지를 잡아당기면 구름도 함께 딸려 올 것 같았다. 저 멀리 이름 모를 산봉우리 위로 펼쳐진 구름은 마치 기마병들이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습지의 데크 길을 걷는 동안 하늘만 쳐다본 덕분에 습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아쉬울 건 하나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늘 하늘을 이고 살지만, 하늘이 저 위에 있는지를 잊고 산다. 늘 마시고 사는 공기를 잊고 살 듯이 말이다. 서늘한 기운의 바람과 높고 푸른 하늘 그리고 하늘을 멋지게 수놓은 하얀 구름이 가을을 몰고 온 것 같아 참으로 반가웠다. 이제 조심스럽게 가을을 입에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