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등산 마니아였다. 쉬는 날이나 주말이 되면 산을 올랐다. 좋은 것도 과하면 안 되는데 너무 무리했는지, 어느 날 생각지도 않게 족저근막염이 생겼다. 그때부터 족저근막염과 지긋지긋한 싸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 나은 것처럼 멀쩡하다가 다시 또 아프기를 반복한 게 벌써 10여 년이 넘었다. 이곳저곳 병원도 많이 다녔지만, 이젠 그러려니 하면서 함께 지낸다. 덕분에 등산하고는 진즉에 담을 쌓았다.
딸아이가 포항에서 가볼 만한 곳으로 알려준 곳 중의 한 군데가 곤륜산이었다. 곤륜산을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발바닥이었다. 어느 산이고 정상에 오르면 힘들여 올라간 만큼 멋진 경치를 만날 수 있다. 오랫동안 등산을 했기에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족저근막염 때문에 곤륜산 가는 걸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산이 너무 오랜만이라 잘 올라갈 수 있을까? 발바닥이 아프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20여 분만 올라가면 곤륜산 정상이라는 딸아이 말에 용기를 냈다. 한때 그렇게 열심히 등산했는데 썩어도 준치라고 그까짓 20분을 못 오르겠냐는 생각으로 곤륜산에 발을 들여놓았다.
곤륜산 정상은 곤륜산 활공장이다. 곤륜산의 높이가 177m니까 사실 높은 산은 아니다. 그렇다 보니까 힘들여 오랜 시간을 오르지 않아도 정상에서 탁 트인 경치를 즐길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 모양이었다. 오르는 길은 흙길이 아니라, 패러글라이딩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포장된 콘크리트 길이었다.
걷기는 편하지만, 산길을 걸어 오르는 맛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길의 경사가 무척 급했다. 곤륜산을 오르는 길은 시작부터 경사였다. 경사가 어찌나 급한지 차가 오르려면 거의 뒤로 누워서 가야 할 것 같았다. 시작부터 경사 길이라 얼마 가지 않아 호흡이 가빠졌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몸으로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예전에 오르막길을 오르던 요령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급한 경사길을 오를 때는 보폭을 짧게 하고 최대한 내 호흡을 유지하면서 쉬지 않고 오르는 게 나만의 요령이었다. 그렇게 몸이 적응하면서 오르막을 오르는 게 한결 수월해졌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몸을 뒤로 돌려 굽어보면 발밑으로 보이는 세상이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세상처럼 새롭게 보였다. 시원하게 탁 트인 경치에서 얻는 즐거움과 만족감이 계속 올라갈 힘이 되어 주었다. 20분이라는 기준이 아마도 젊은 사람들 기준이 아닌가 싶다. 쉬지 않고 올랐는데도 그보다 시간이 더 걸려 곤륜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라 넓은 평지에 인조 잔디가 깔려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느 산 정상에 올랐을 때와는 분위기와 느낌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산의 정상은 정상이라 눈에 들어오는 경치는 시원했다. 특히 곤륜산 정상의 경치는 여느 산과는 달리 다양한 경치를 품고 있었다.
앞쪽으로는 탁 트인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뒤쪽으로는 굽이굽이 물결치듯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이어졌다. 그 산봉우리들 사이로 도로가 보이고, 건물들은 마치 건축 모형도의 모형 건물처럼 보였다. 양옆으로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는 바닷가의 마을이 펼쳐지고, 포항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산업시설들이 저 멀리 보였다.
곤륜산 정상에서는 이렇듯 사방의 다른 경치를 볼 수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의 경치 중에서 제일 멋진 경치를 고르는 게 부질없는 짓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바다 경치가 제일이었다. 그 넓고 푸른 바다를 품 안에 끌어안을 수는 없지만, 가슴에 품을 수 있었다. 이걸 호연지기라고 했던가.
울릉도로 가는 배를 꼼짝 못 하게 했던 거칠고 강한 바람이 곤륜산 정상으로 사정없이 불어왔다. 때론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 강한 바람이 불었다. 날씨만 좋으면 아무 데나 자리 잡고 앉아 바다를 보면서 망중한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럴 계제가 아니었다. 산에서 내려올 때의 기분은 누구나 즐겁고 발걸음은 가볍다. 정상을 밟았다는 뿌듯함과 함께 정상에서 바라본 멋진 경치의 여운이 남아 그럴 수밖에 없다.
올라올 때는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내려가는 길에서는 올라오는 사람들이 조금씩 보였다. 그중에는 젊은 커플도 있었다. 그들이 곤륜산 정상에서 어떤 추억을 만들고, 어떻게 예쁜 인생 사진을 남길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