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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Jan 27. 2024

책 위에 사람들

식사 대신 글


# 오래전 인연

 *책 위에 사람들은 책에 등장하지 않으면서 책 위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계속 그 책 안에 있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때론 어둠에 갇혀 막막했을 테고 또한 수많은 독자들의 손에 닳고 닳아 지워진 인쇄 잉크처럼 흐린 글씨체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나는 책 위에서 걷고 있는 그들 가운데 몇 명 수 십 년 전에 만난 기억을 떠올린다. 어떤 친구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또 어떤 친구는 이 땅에서 살고 있다. 그들과 나는 삼십팔 구 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야 만난다.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 학교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태화강변으로는 군락을 이룬 대나무 숲이 마치 한 덩어리 덤불숲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거기서 한참을 떨어져 있는 곳에 자리한 학교 앞 건널목 정거장에는 교복을 입은 검은 까마귀 (학생들)가 뭉텅뭉텅 무리 지어 강바람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버스를 기다리고 서있다. 버스 정류장 뒤는 에누리 없이 한 걸음만 뒤로 가도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진 논두렁이었다. 거기서부터 강변까지 주택들과 건물들이 올라가고 골목과 산책로가 조성될 앞으로의 날수는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신설된 지 3,4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중학교 분위기는 왠지 푸릇푸릇했다. 오래 묵은 내음이 나지 않는 학교였다.


여느 때와 같이 수학 수업을 하러 들어갔던 중학교 1학년 1반 창문 쪽 맨 앞줄에 앉은 학생과의 대화가 기억난다.


-너는 왜 수학책이 없는데?

-깜빡하고 안 갖고 왔는데요! (꽤나 당당하게 대답했다)

-근데, 책가방은 어디 갔는데?

-있지요~ 그게... (옆에 앉아있던 짝지가 뭔가 아는지 실토할 뻔했다)

-내가 그 가방에 대해 한번 맞춰 볼까?

-뭔데요?... (선생이 뭘 안다고 맞추겠다고 도발하는 건지?라고 불신의 눈빛을 보내왔다)

-네가 어제. 수업을 마치고 교문 밖으로 나갔지. 가다가 교문 옆 문방구로 들어갔을 테고. 거기 오락기에 정신을 쏙 뺏겼을 거야. 한참 재미나게 게임을 하다가 책가방이 통째로 없어진 거야!

-.....::

학생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얼굴이 하얗게 사색이 되었다. 근처에 앉아 있던 반장이 대신 대답했다.

-선생님! 어제 얘 뒤따라 갔었어요? 얘 진짜로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렸거든요. 그것도 문구점 오락실에서요. 


고난이 수학 문제를 푼 사람처럼 내가 추측했던 대로 그 학생의 동선을 맞췄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처벌이 내려질지 모른 데다가 가방을 잃어버린 경위를 선생의 입을 통해 들었다는 진퇴양난에 빠진 학생을 쳐다봤다. 


-내가 오늘은 안 때릴 거다. 대신 내일 수업 때까지 수학책은 어떡하든 찾아와. 알겠나~


1학년 1반 창문으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유난히 뜨거웠다.  창문 턱에 기대어 학생들이 열심히 수학 문제를 푸는 동안 가방유실자 학생과 주변 친구들의 반응에 어이없어하며 웃음이 났다. 그곳에 앉았던 학생들 가운데 작은 키에 머리키락을 다 밀어서 두상이 이쁜 아이가 있었다. 까불거리고 말하는 속도도 빠르고 동급생들이 귀여워하는 학생이었다. 아이들이 류 아무개(이름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목사님이라고 하며, 류 00 아버지의 직업이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곳 학교에서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던 몇 년 뒤, 진해가 고향인 후배 집으로 놀러 갔던 봄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류 00 이가 오십 여 미터 저만치서 지나가는 게 아닌가. '쟤가 왜 진해에 있는 거지?' '저 옷차림새 봐라..' 류 00은 고등학생이 되었고 울산이 아닌 타지를 맴돌고 있다. 대체 몇 년 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걔네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 주변에 사복 경찰들이 진 치고 있던 장면을 본 지 한 달도 안 됐다. 그 장면이 저 애랑 무관하지 않다면?... 그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겠다.


기억 속 시간은 순서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뒤에 것이 앞섰다가 앞엣 것이 소실되기도 하고 상상까지 기억 행세를 하고 끼어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기억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내 의도에 따라 이야기가 맞춰진다. 왜냐면 앞에 일어난 사건이 나중에 해석될 때는 그 사건과 해석은 한 덩어리로 설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류 00에 대한 기억도 그렇다. 내가 진해에서 그 친구를 먼발치에서 보고 나서 한참 뒤에 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류 00의 사망과 그에 관한 전언을 듣게 되었다. 힘들었다. 깨발랄하던 아이의 목소리와 교실 복도를 뛰어다니던 명랑했던 중학생 류 00이 한 동안 내 눈에 밟혔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자식을 어떻게 키웠길래? 그 지경까지 몰아가게 했나? 궁금했지만 일면식도 없는 아이의 아버지를 만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류 00과 오함마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에 등장하는 오작가(주인공)의 이복형제 오함마(오한모가 본명이다)가 동생이 던져준 노인과 바다를 제대로 읽고 나서 했던 말이다.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누구일까? 애써 잡은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불운한 노인일까, 아니면 노인으로부터 그 물고기를 빼앗기 위해 피냄새를 맡고 몰려든 탐욕스러운 상어일까?

오함마가 《노인과 바다》를 다 읽었다고? (뻥치시네!)

-그런데 어젯밤에 나는 깨달았어. 나는 노인도 아니고 상어도 아니야. 나는 바로 그 노인에게 잡힌 물고기야.

노인이 멧돼지라도 낚았나?

-낚싯바늘에 입이 꿰어 고통에 몸부림치다 곤봉에 맞아 끝내 아름다운 몸체를 뒤틀며 숨을 거둔 물고기. 고깃배에 매달린 채 상어들에게 살점을 물어뜯기고 피를 흘려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던 바로 그 청새치. 그러다 마침내 온몸의 살점이 모두 떨어져 나가 거대한 뼈만 남은 채 돛대에 수치스럽게 매달린 청새치...... 그게 바로 나야.

-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양아치지만 그래도 언제나 네 형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잘 있거라. 오감독. 나는 간다.

천명관, 《고령화 가족》 중에서 147쪽~148쪽에서 인용


너무 오래된 사람의 지워진 얼굴 생김새와 표정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교차되고 있었다. 그 학생이 스스로를 양아치라고 말하는 오함마라는 인물에서 툭 튀어나왔다. 사기. 강간. 도둑질로 전과 5범에 구치소를 제 집인냥 드나들었던, 나이 오십 둘에 오함마를 닮은 데라곤 찾아보기 힘든 류 00과 공유되는 삶의 궤적들의 결과는 달랐다. 오함마는 내연녀와 함께 방콕행 비행기를 탔고, 류 00은 죽었다. 마치 헤밍웨이가 자신의 엽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결말과 다른 결론을 내린 오함마를 대비하며 끝까지 살아남기를 응원하는 작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양아치로 사는 게 무슨 가치가 있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이니까. 가치 없는 인생도 사람이니까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학생 말고도 한 사람이 더 떠올랐다. 세월의 강가에서 한 친구를 건져 올렸다. 송 00은 유치원 동급생이었다. 마을에서 잘 생긴 아이로 어른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던, 학교에 입학하면서 공부도 잘했던 남자아이였다.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은 마을 동네 친구로 놀았다는 정도이다. 내가 유치원을 졸업하고 몇 년 뒤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면서 그 친구와의 어린 시절 추억은 중단되었다. 그 친구 이름을 소환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여전히 바닷가 해녀 일을 하고 계셨기에 마을 사정을 가끔씩 물어오셨다. 내가 성인이 다 되었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가 하늘이 내려앉는 절망적인 표정과 목소리로 내게 전해준 말이 '송 00이 죽었단다. 애가 자꾸 엇나가고 나쁜 짓을 해서 아버지가 애를 개 목줄로 묶고 광에다 가둬놨다는 거라....'  비참한 일이다.



"고기가 한 차례, 헤밍웨이가 한 차례, 그리고 장맛비가 한 차례 지나가고 나자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었다."

(위에 책 96쪽에서 인용)


맞다.

한 차례씩 지가는 것. 한꺼번에 다 지나가지지 않는다.





인용 도서


천명관, 《고령화 가족》, 문학동네, 2023년 1판28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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