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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Apr 27. 2024

덜어낼 때

무제

3월21일에 요리학원을 등록해서 한 달간 한식조리 과정을 수강했다. 수업 일수를 채워야겠기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출석 카드를 찍었다. 지각하면 큰일 날 것처럼 잰걸음으로 학원 건물 1층에 도착하는 날에는 엘리베이터가 몇 층에 멈춰있는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요리학원은 건물 5층에 있고, 내 앞서 누군가가 5층에서 내렸다는 발자국 같은 숫자 '5'를 확인할라치면 왠지 화가 났다. 최소한의 배려 차원에서 엘리베이터 1층을 눌러놨다면 나는 아주 기뻤을거다. 그래서 한 번은 5층에 내리면서 1층 버튼을 눌렀다. 어쩌면 나를 위한 위안의 터치가 아니었을까.


요리를 배우는 즐거움은 재료마다 크기와 무게를 재면서부터 서서히 긴장과 초조감으로 바뀌었다. 새끼손가락 안쪽이 5센티미터, 바깥쪽이 6센티미터라는걸 확인하는 기쁨을 누릴 여유도 없이 0.2부터 0.5cm, 2, 3cm... 까지 눈끔 보듯 음식 재료들을 썰어야 했다. 길이제기의 한계가 왔을 때는 과감하게 플라스틱 자를 갖다대면서 잘랐는데 가슴에 내려앉는 찝찝한 여운. 불법을 저질렀다는 기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자를 사용하는건 한 번으로 족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길이에 대한 스트레스는 수업 3주차를 보낼 즈음엔 에라 모르겠다. 내 손가락을 믿어보자!는 마음이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농담이 현실로 다가왔던건 금요일부터 주일까지 몰려 있는 독서모임으로 바닥을 쳤다. 결국 주일에 유치부 봉사를 잠시 쉬기로 결정했다. 나를 위해서 내린 결정이다. 아침 아홉시부터 오후 시까지 점심시간 이십 여 분 정도의 식사교제를 빼면 안식일이 가장 바쁜 날이다. 그렇게 그 하루를 끝내고나면 끓는 물에 데친 나물처럼 축 늘어져 걷기조차 힘들다. 매 주일마다 전쟁을 치르다가 번아웃이 왔다. 일을 나무 베듯 쳐낼 수 있어도 소진되어가는 체력과 감정은 계속 뒷전으로 밀리는 상황이 되어갔다.


매일의 일과를 마치고 다음 날을 맞이하고 보내는 동안 직장인 책 모임에서는 세계문학 시리즈로 매주 한 권씩 모임을 진행했다. 그 외에 <천로역정> 독서모임, 어린이 그림책 모임을 진행하면서 백수로서 건강상의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나를 조용하고 안온한 상태로 놔두지 못해서 스스로를 들볶고 있었던 것 같다. 봄밤에 가로등 불빛에 희뿌연 벚꽃을 마주하는 시간도 없이 지났다. 그래서인지 벚꽃이 피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벚꽃나무 가로수가 전해주는 경쾌한 기분은 나의 폐부까지는 전달되지 못했다. 벚꽃이 바람에 흩날려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듯 개인적 낭만과 평온함이 시나브로 사라졌다. 쉼을 내지 못하는 형편에서 나의 분노를 돋구는 일이 벌어졌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SS아파트는 도로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형국인데, SS아파트를 빙돌아 울타리처럼 심기운 오래 된 벚나무들이 몸의 절반이 댕강댕강 벌목된 광경을 목격했다. '그냥 좀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한숨. 나의 권리 하나를 박탈당한 기분이랄까.


저 멀리 장생포 앞바다가 있다. 재개발 구역으로 묶인 저 마을을 사진에 담는다.

4월24일에 요리학원 과정을 수료했다. 그 다음날 집 근처 수변공원으로 나가서 아주 천천히 걸었다. 연두빛 어린 잎들이 나무마다 올라오고 있었다. 그 어린 이파리들의 힘찬 생명력을 받으면서 늘어져 있던 몸을 곧추세우고 한 걸음씩 걷는걸 느끼고 싶었다. 한동안 모든걸 담아냈으니 이후로 당분간 덜어낼 차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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