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콤쌉싸름 신 맛 에너지
남편은 수제맥주를 만드는 브루어(Brewer)이다. 수제맥주를 사랑하는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으니 그에게는 최고의 직업인 셈이다. 전 세계의 멋진 브루어리와 수제 맥주를 방문하고 맛보는 것이 그의 꿈이고 직업으로 그 꿈을 이루고 있다. 마케팅 일을 좋아는 하지만 아침마다 죽상을 하면서 회사 때려치울 생각으로 겨우 다니는 나와는 대비되어 참 얄밉기도 하다.
하지만 그를 통해 넓어진 수제맥주에 대한 견문과, 그가 데리고 다니는 재미 없는 브루어리 투어에서 (탱크와 밸브와 파이프, 그리고 더 많은 탱크! 그것이 다다!) 디즈니랜드 온 아이처럼 신나 하는 그를 구경하며 맛있는 맥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효익은 충분히 누리고 있다.
덕분에 우리 집 냉장고는 늘 다양한 수제맥주들로 가득 차있는데 맥주에 대해 견문이 없는 나에게는 브루어리가 어떻고 재료가 어떻고 간에 주로 '쓴 맥주', '더 쓴 맥주', '밍밍한 맥주' 그리고 '신 맥주' 정도의 감상이다. 아, 마케터로서 라벨이 예쁘면 더 좋고. 맥주가 맥주 맛이지 뭐가 크게 다르겠는가!
하지만 남편은 맥주에 대해 일자무식한 내가 표현하는 맥주 맛 감상을 좋아하기에 요즘은 조금 더 꽃향기가 나고~ 음 열대과일 향이 나네 정도로 맥믈리에 빙의하여 열심히 노력 중이다. 그렇지만 노력해도 영 친해지기 어려운 맥주가 있는데 바로 Sour Beer (신 맥주)이다. 맥주 덕후들의 최종 보스와 같다던,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맥주이기도 하다.
맥주가 시다니! 맥주라고는 소맥밖에 모르는 나에게 처음 접해본 사워 비어는 마치 한여름 푹 쉬어버린 보리차를 마시는 듯 끔찍한 맛이었다. 이것은 식초도 아니고, 주스도 아니고, 맥주도 아니고 요상한 신 맛. 이런 신 맛이 맛있다고? 소중한 맥주 산업을 이런 미각을 가진 애한테 맡겨도 되는 걸까?
이런 나에게 남편은 맥주는 자기가 만들지만 이 맛있는 신맛은 자연이 만들어주기 때문에 굉장히 만들기 어렵다며 발효음식의 나라에서 자란 내가 이 신 맛을 싫어할 리가 없다며 웃었다.
사실 맥주의 원료는 아주 심플하다. 물, 맥아, 홉, 효모. 이 네 가지가 꽃 향도, 과일 향도 만들어내는데 그중에서 신 맛은 그 중 무엇도 아닌 박테리아의 역할이다. (나쁜 것은 아니고 숙성을 위해 필요한 건강하고 좋은 프로박테리아) 재밌는 것은 이를 잘못 활용하면 정말 쉬어버린 맛이 나는데 (off-flavor) 이를 잘 컨트롤하면 맛있는 신 맥주가 되는 것. 실수와 의도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남편은 이 '의도한 실수'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사람들은 신 맛을 참 좋아한다. 세상에 맛있는 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단순하게 신김치부터, 와인, 피클, 커피, 치즈, 초콜릿 등등 모든 만찬과 디저트에는 꼭 신 맛이 있다. 신 맛은 사람을 깨워주고 붕붕 띄워주는 에너지가 있는 것 같다.
'실수'가 잘 숙성될 수록 사람을 기분 좋게 띄워준다니 아주 재미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집에서 보내는 주말이 많아진 요즘, 우리는 매주 금요일을 사워비어의 날로 정했다.
우울한 한 주를 기분 좋은 신 맛으로 마무리하고 신나게 주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나는 사워비어의 신 맛이 역시 영 어색하지만 한 모금 한 모금 마시다 보면 천천히 말이 자꾸 많아지고, 기분이 붕붕 뜬다. 사워 비어 안 효모들의 작용인 걸까? 와인처럼 우아하고 고상하게 취하고 싶은데 자꾸 푸스스 바보처럼 가벼운 웃음만 나며 취한다. 게다가 그 신 맛의 자극은 꽤 중독적이다. 한 모금 모금마다 얼굴이 찌푸려지고 손이 곱아들지만 자꾸자꾸 손이 간다. 사워비어를 좋아하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다음 주 금요일의 사워비어 데이가 기다려진다.
새콤쌉싸름한 맛.
Peach Cruisin by Rare Barrel brewery (USA)
오크통에 복숭아와 자스민 티를 넣고 숙성시킨 사워로 가볍고 산뜻한 복숭아향의 신맛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