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와 흙수저

먼 옛날, 흙수저가 세상의 주인이었던 때의 이야기

by 김혁

아주 오랜 옛날,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수저왕국이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너무나 착하고 욕심이 없어서, 재산이라고는 비바람을 피할 작은 오두막집과 입고 있는 옷과 밥그릇과 수저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이상 무얼 더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이 가진 물건을 도둑질을 하거나, 재물을 서로 더 갖겠다고 다투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왕국에는 별달리 법이 필요치 않았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법조문 몇 구절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것도 법이라기보다는 신앙에 가까웠다.


세상 만물이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니, 너희는 언제나 흙을 숭상하라!

땅이 하늘이고 하늘이 땅이니, 땅을 하늘로 여기고 하늘을 땅으로 여겨라!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적게 가지는 자야말로 우리 왕국의 진정한 계승자니라!


사람들은 이 법을 철저하게 믿고 따랐다. 그리고 땀 흘려 일하는 것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알았다. 당연히 먹고사는데 꼭 필요한 만큼만 일을 했고, 그 이상은 절대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임자 없는 땅도 널려 있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남는 양식은 모아 두었다가, 몸이 약하거나 병들어서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래서 다들 몸과 마음이 여유롭고 넉넉했으며, 늘 평화로웠다.

유일한 걱정거리라면, 수저왕국의 땅을 노리는 이웃 왕국의 존재였다. 금돼지를 숭배하는 그들은 수저왕국과 달리 매우 탐욕스럽고 호전적이어서, 틈만 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쳐들어왔다. 하지만 한 마음 한 몸으로 일치단결하여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수저왕국 사람들에게 번번이 쫓겨 갔다.

수저왕국 사람들은 수저를 매우 귀하게 여겼다. 평소에 밥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 곧 밥이라는 신앙을 깊이 지니고 살아왔기 때문에, 수저를 하늘과 이어주는 신성한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수저는 왕국 사람들의 신분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자연히 수저왕국이 되었다.


이런 수저왕국에도 잘 사는 계급과 못사는 계급의 차별이 있었다.

수저왕국에는 흙을 튼튼하게 구워서 만든 흙수저와, 은을 아름답게 세공해서 만든 은수저와, 금으로 화려하게 치장해서 만든 금수저, 이렇게 세 종류의 수저가 있었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는 물론이고, 큰 행사를 하거나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각각 저마다 가진 수저를 소중하게 사용하였다.

흙수저는 농사나 어업이나 각종 물건을 만드는 일을 하는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였고, 은수저는 여러 가지 문서나 서류를 작성하는 일을 하는 관리직들이 사용하였고, 금수저는 백성들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글을 짓고 음악을 연주하는 일을 하는 사제들이 사용하였다. 수저 가격도 흙수저가 가장 비쌌고, 은수저와 금수저가 그 뒤를 이었다.

본래 욕심도 없고 일하는 것을 매우 신성시하는 수저왕국에서는 흙수저가 곧 나라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서로 앞 다투어 힘든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흙수저는 숫자도 가장 많았고 또 가장 풍족하게 먹었다. 흙수저 덕에 먹고 사는 은수저는 늘 흙수저에게 감사하며, 흙수저가 먹고 남은 음식을 먹었다. 금수저는 또 은수저가 먹고 남은 걸 가지고 마지막으로 먹었다. 누구나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금수저는 늘 은수저를 부러워하였고, 은수저는 늘 흙수저를 부러워하였다. 당연히 금수저와 은수저는 기회만 되면 흙수저가 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몸이 튼튼해야 하고, 일을 할 때 신성한 노동의 기쁨을 느낄 줄 알아야 하고, 남을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과 봉사를 할 줄 아는 공동체 정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은수저와 금수저는 이런 면에서 한참 부족하였다.

왕을 선출하는 방식도 아주 독특하였다. 수저왕국 사람들은 아무도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뽑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일을 제일 잘하고. 몸이 가장 튼튼하다고 소문난 흙수저 중에서 한 명을 억지로 추대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왕으로 추대된 자는 절대로 거절하지 않는 게 왕국의 자랑스러운 전통이자 불문율이었다.

왕의 역할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일손이 급히 필요한 곳에 달려가 힘을 보태거나, 몸이 아픈 사람을 찾아가서 정성껏 돌보거나, 이웃 왕국과 싸움이 벌어졌을 때 앞장서서 싸우는 등 험한 일들뿐이었다. 그래도 한번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조금의 불평불만도 없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였다.


수저왕국에서 금수저로 살아가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흙수저가 될 수 없었다. 늘 배고픔과 차별에 시달리던 금수저들은 오랜 고민 끝에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그들은 이웃 왕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지원을 받아서 치밀하게 계획을 짠 뒤, 은밀하게 소문을 퍼뜨렸다.

=이제 흙수저들의 시대는 끝나고, 금수저들의 시대가 온다!

=흙 대신 금을 숭상하라! 금이야말로 변치 않는 진짜 보물이니라!

=적게 먹고 적게 가질수록 가난하고, 많이 먹고 많이 가질수록 부자니라!

그리고는 만만해 보이는 흙수저들에게 접근해서 함께 어울리면서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힘들게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게 얼마나 좋은지, 춤과 음악을 즐기며 사는 게 얼마나 멋지고 신나는 일인지, 세상은 얼마나 넓고 재미있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일만 죽도록 하다가 죽으면 인생이 얼마나 불쌍한지, 그리고 금으로 만든 수저가 은이나 흙으로 만든 수저보다 얼마나 귀하고 비싼지를---.

처음에는 아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다들 들어서는 안 될 아주 심한 욕이라도 들은 양 부끄러워했다. 심지어는 수치스럽다며 흐르는 시냇물에다 귀를 씻는 사람조차 있었다. 하늘에 죄를 짓고 살라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하는 즐거움과 보람과 신성함에 비하면, 그건 너무나 비열하고 염치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워낙 교묘하고 조직적으로 소문을 내는 바람에 파급력이 조금씩 커져만 갔다.

=허허! 원 세상에, 이렇게 천박하고 해괴한 일이 다 있나, 그래.

=흙 대신 금을 숭상하라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개, 돼지가 되는 것이 낫지.

=이게 다 금돼지를 숭상하는 이웃 왕국 놈들이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공작이야.

=맞아, 맞아. 그놈들 수작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수저왕국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호기심 많은 흙수저 몇몇이 그만 꾐에 빠지고 말았다. 마침 몸도 약하고 여기저기 아파서 일하기가 힘들었던 그들은 눈을 딱 감고 금수저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금수저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원래는 금수저였는데 신분을 위장하고 잠시 흙수저 노릇을 했다는 설과, 금수저 쪽에서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간자들이었다는 설이 분분하였다.

어쨌거나 금수저 노릇도 한 번 해 보니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나쁘기는커녕 너무 좋았다. 가슴속에서 울려오는 양심의 소리만 모른척하면 만사 그만이었다. 얼굴이 더욱 두꺼워진 그들은 주변 사람들을 몰래 하나하나 끌어들였고, 방심하던 사이에 차츰 금수저에 동조하는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린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우린 참 바보처럼 살았네요~.

=노세 노세 금수저일 때 노세, 흙수저가 되면 못 노나니~.

=우린 알아요. 이 밤이 흐르면 금수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런 노래들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그동안 일할 때 부르는 노동가요만 진정한 노래로 인정받고 불렸는데, 그런 가요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파격적인 가사와 리듬을 가진 노래들이 사람들의 가슴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어느덧 소박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하던 수저왕국에 금수저 흉내 내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다들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춤추며 놀기에 바빴다. 흙수저들은 앞 다투어 자신들의 수저를 갖다 바치며 금수저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금수저로 사는 법을 열심히 배웠다. 곳곳에서 금수저 흉내 내기 경연대회도 성황리에 열렸다.

=이러다가 나라가 망한다! 제발 정신들 좀 차려라!

앞날을 걱정하는 나이든 흙수저 현자들의 피 끓는 충고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윽고 때가 무르익자, 금수저들은 자연스럽게 흙수저들이 가졌던 모든 권한을 틀어쥐었다. 이 모든 것이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하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긴 결과였다. 이제 모든 권력은 금수저들의 손아귀에 몽땅 들어왔다.

막강한 힘을 손에 쥐자마자 금수저들은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무섭게 돌변하였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포고령을 선포한 뒤, 흙수저들 위에 폭군처럼 군림하기 시작하였다.


지금부터 이 왕국은 우리가 다스린다. 모두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

흙수저 왕국은 이제 없다. 앞으로 찬란한 금수저 왕국을 건설하자!

이웃 왕국을 이기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밤낮없이 일하라!


금수저들은 흙수저들에게 강제로 일을 시키며 노예 부리듯이 부렸다. 명령에 반대하거나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비밀리에 조직한 군대를 동원하여 잔혹하게 응징하였다. 그리고 은수저들에게 관리인 완장을 채우고는, 말을 듣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고, 가차 없이 벌을 주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제 수저왕국은 어둠의 왕국이 되었다. 자유와 평등과 신성한 노동의 기쁨과 아름다운 공동체 정신은 사라지고, 오로지 밥덩이를 위한 비참한 노동과 비정한 경쟁만 남았다. 그리고 흙수저의 고혈을 빨아 호의호식하는 금수저의 잔혹하고 추악한 갑질 놀음만 횡행하였다.

흙수저들은 행복했던 옛날을 생각하며 쓰라린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때로 돌아가려고 힘닿는 대로 저항하고 반란도 일으켜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 번 빼앗긴 흙수저의 신성한 권리와 힘은 찾을 수 없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금수저가 은수저와 힘을 합쳐서 만들어 놓은 막강한 착취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아, 그리운 옛날이여! 그때 우린 얼마나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했던가!

=우리가 너무 못나고 어리석어서, 저 금수저들의 간교한 계책에 속은 거야.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참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 다시 좋은 날이 오겠지---.

흙수저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행복했던 옛날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하루하루 열심히 일을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참고 기다려도, 그런 날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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