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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근 Aug 02. 2022

Pride Portfolio?

"이력서는 아무래도 업무 능력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게 어떨까요?"

(2020년 4월에 저장된 글을 이어 쓴 글로 현재 상황과는 차이가 있는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이직을 열심히 준비 중이다. 현회사의 꼬라지에 대해 일러바치지는 않겠다. 어쨌든 수많은 곳에 이력서를 넣었고 헤드헌터를 통한 제의도 많이 받았다. 원하지 않는 업종에서의 제안도 많이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시간을 틈틈히 내서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눈치껏 연차도 써가며 면접을 보러 다녔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마음이 붕 떠버린 회사를 다니며 이직 궁리만 하던 어느 날, 헤드헌터로부터 메일이 왔다. 괜찮은 포지션과 조건이어서 승낙을 바로 했고 이력서를 업데이트 해서 포트폴리오와 함께 헤드헌터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퇴근 지문을 찍고 전철역으로 가던 오후 6시 10분쯤, 헤드헌터로부터 전화가 왔다.


연봉은 협의로 써놓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식의 의례적인 이야기들을 주고 받고, 한 템포 쉬더니 헤드헌터가 입을 열었다.


"근데, 저,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는데..."


한 소절만 듣고도 감이 왔다. 이력서 사방팔방에 오픈 해놓은 내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 뻔했다. 헤드헌터의 말을 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성정체성 관련한 부분 말씀하시는 거죠?"


"아, 예예. 제가 상근님의 개인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은 아니고, 아무래도 이직이다 보니까 균형감 있는 이력서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업무 능력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게 어떨까요? 자기소개서 부분에 해당 내용이 꽤 길어서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 이래로 얕으나 깊으나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계속 몸 담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러한 부분을 빼고 이야기 한다면 나라는 인간은 20대를 허송세월한 인간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직군에서 일을 함에 있어서도 그 때의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 소개서에는 늘 커밍아웃 이야기가 들어갔었다. 수많은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았어도 이 이야기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직 때문에 마음이 초조해진 나는 헤드헌터에게 원래 성격대로 할 말을 하지 못 했다.


"네, 뭐 그러죠. 어차피 회사는 능력으로 평가 받는 거니까요."


"그러면 제가 좀 자소서 부분 손 봐서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평소 성격이었다면 아마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능력과 상관없는 부분이라면 왜 제 자소서에서 저에게 중요한 부분을 빼야 하는 건가요?'

'이 판단은 헤드헌터님의 개인적인 의견인가요, 아니면 고객사의 성향을 고려한 제안이신가요?'

'제 정체성이 문제되는 회사라면 저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만.'


수많은 서류 탈락과 면접 탈락을 거친 나는 이직 시장에서 '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때문에 머리에서 맴도는 말들은 하나도 꺼낼 수가 없었다.


딱히 굴욕적이진 않았다. 다만 여전히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다시금 느꼈을 뿐이었다.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였고, 그 운이 늘 작용하지 않는 사회라는 걸 말이다. 성정체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업무 능력으로만 평가받을 수 있는 사회였다면 헤드헌터가 저런 이야기를 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헤드헌터 입장에서도 내가 붙어서 입사를 해야 수수료를 받을테니, 초장부터 밑지고 들어갈 수 있는 리스크를 제거하고자 했던 것 아니겠는가. 한국에서 성소수자라는 것은 그런 계산까지 고려해야 할 수밖에 없는 위치인 것이다.


다음에는 저 이야기들을 꺼낼 수 있을까? 내 능력이 출중해져서 을이 아닌 상황에서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내 능력이 가파르게 성장하는 속도가, 성체성이 구직 시장에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사회가 오는 속도보단 더 빠르다고 생각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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