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지나가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마라톤 시즌이 왔다. 마라톤 한번 치르고 나면 몇가지 평생의 기념품으로 남는것들이 있는데 메달, 피니셔자켓, 참가기념티, 그리고 사진이 빠질 수 없을 것이다.
나도 뉴욕마라톤을 포함해 다수의 하프마라톤 대회를 뛰어봤지만 사진은 ”돌아갈 수 없는 그 순간“의 모습으로 남는 특별한 기념품이다.
메달이나 피니셔 자켓은 수십년이 지나도 그대로 거기 있지만, 코스를 힘차게 누비는 나의 모습은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질 것이기에, 가장 빛났던 그 젊은 순간의 내 모습으로 남은 사진은 각별하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코스에서 사진을 찍혀보기도 많이 했지만 부업으로 레이스 포토를 찍는 포토그래퍼이기도 하기 때문에, 찍는 사람 기준으로 사진이 잘 나오는 방법을 소개해보겠다.
1. 카메라 의식
뉴욕에서는 작은 대회는 주최측 포토그래퍼가, 큰 대회는 사진업체에서 나와서 사진을 찍는다. 포토그래퍼는 눈에 띄도록 형광색 조끼를 입고있으므로 저 멀리 포토그래퍼가 보인다 싶으면 마음의 준비를 하는것도 좋다.
정말 멋진 인생샷을 위해서는 페이스를 조절해 포토그래퍼 앞을 지날때 내가 중앙에 위치하도록, 혹은 나 혼자만 있도록 조절하는것도 좋다.
포토그래퍼도 저쪽에서 러너가 달려오면서 카메라를 의식한다는 사인을 주면 기다렸다가 그 사람을 중심으로 찍어준다.
2. 허리 펴고, 턱은 당기고, 무릎 높게
달리다가 힘이 빠지면 자연스럽게 허리가 구부러지는데 이때 사진을 찍으면 정말 안나온다. 그렇다고 강제로 허리를 펴면 고개가 뒤로 젖혀지므로 조금 의식했다 싶을 정도로 턱을 당겨줘야 강인한 인상으로 찍힌다.
무릎을 높게 들고 보폭을 늘리는것도 중요한데, 그렇게 하면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진 상태에서 찍힐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지면 접촉시간의 감소)
다리의 근육이나 상체가 지면 충격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예쁜 모양으로 찍힌다.
하지만 이 세가지, ”허리 펴고 턱 당기고 무릎 높게“는 바람직한 러닝 폼의 기본중의 기본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냥 잘 뛰는 사람이 사진에도 잘 나온다.
카메라가 보인다고 잘 찍히려는 (혹은 많이 찍히려는) 욕심에 속도를 낮추면 모든것이 역효과가 난다.
지면 접촉시간이 늘어나 발이 땅에 닿은 사진이 찍힐 확률이 높아진다. 소위 살 출렁거림 샷이 찍힌다.
보폭을 좁혀 종종거리며 뛰는것도 사진이 안 예쁘게 찍히는 지름길이다.
3. 선글라스
선글라스는 코스 방향에 따라 아예 필요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표적으로 뉴욕마라톤은 북쪽을 향해 계속 뛰므로 굳이 없어도 됨) 사진을 위해서는 끼는게 좋다. 선글라스를 끼었을때 확실히 덜 힘들어 보이고 더 강인한 인상을 주기 때문.
땀 때문에 화장이 지워지기 쉬운 눈 부분을 가려주는것도 한몫 한다.
4. 헤어 활용
여자 러너의 경우 긴 머리를 활용해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흔들어 휘날리게 하는것도 좋은 연출법중 하나다.
하지만 이건 체질상 땀이 많이 안 나고, 본인이 머리를 휘날리며 뛰는것에 거부감이 없어야 가능한 스킬이긴 하다.
남자 러너의 경우엔 모자를 활용해 깔끔하게 정리하기도 하고, 역시 같은 요령으로 휘날리게 하는것도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5. 사진빨 잘 받는 옷
뛰는사람의 기분은 둘째치고 사진빨이 잘 받는건 팔랑거리는 옷이다. 달리기 옷 중에 유난히 팔랑거리는 재질과 디자인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런 옷이 생동감 있고 자연스럽게 사진이 잘 나오는 편이다.
하지만 달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팔랑거리는것보다 딱 붙는게 간편해서 좋은게 사실이니 개인의 취향과 목적에 맞게 선택하면 좋을것이다.
6. 추천 포즈
엄지척, 브이 포즈, 주먹 불끈 포즈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포즈이면서 가장 무난하게 사진도 잘 나온다.
카메라를 잡아먹을듯 달려드는 포즈 / 하이파이브 포즈
하지만 포토그래퍼의 렌즈는 생각보다 망원이기 때문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마세요. 포토그래퍼 기겁합니다
양 팔을 벌리고 날듯이 뛰는 포즈
이 포즈는 웃을 수 있을 때 (초반에) 하면 아주 잘 나온다.
”내가 1등이다“ 넘버원 포즈
사실 이 포즈는 이분이 연령별 1마일 대회에서 진짜로 1등을 하면서 찍혔던 오피셜 사진이 화제가 되어 한동안 뉴욕에서 유행한 포즈다.
본인이 직접 보여주는 그 포즈 (사진속 저분이 화제의 그 주인공이고 70-74세 남자 부문 1등)
쏘니포즈
쏘니포즈, 호우 포즈 등 축구선수의 세리머니를 오마주한 포즈도 아주 잘 나오는 포즈 중 하나.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런 “포즈샷”은 다른 러너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함은 물론이다.
7. 힘들면 힘든대로
하지만 인생샷에 대한 욕심도 하프마라톤까지고, 풀마라톤 피니쉬가 다가오면 사진이고 뭐고 어서 끝났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 때로는 너무 힘에 부치거나 통증이 느껴질수 있는데, 힘들땐 힘든대로 찍히는것도 나쁘지 않다.
뉴욕시티 마라톤에는 마의 다리라고 불리는 퀸즈보로 브릿지에서 많은 러너가 무너지는데, 애꿎게도 이 다리 위에 포토그래퍼가 있다. 이 지점에서 우는 사진이 꽤 많이 찍히는데 그런 사진도 나름의 의미가 있고 멋지기 때문에 힘들면 힘든대로 감정을 표출하는것도 좋다.
마라톤 그 자체로 희노애락이 아니던가.
코스 위에 서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이 멋지고 기념할만한 일이기에, 그리고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의 모습이기에,
힘들면 힘든대로,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대로 보여주는 사진이 오히려 더 귀한 추억이 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완주하는것을 최고의 목표로, 매 순간을 즐길 수 있는 레이스가 된다면
거기에서 찍힌 모든 사진이 “인생샷”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