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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Sep 30. 2023

마라톤 훈련 10주 차 - 비 오는 날 대형견의 기분

3마일 회복주
4마일이지
15마일 장거리주


지난 일요일에 브롱스 10마일 대회를 뛰고 후유증이 심하게 왔다. 지금까지 나는 대회를 뛰었다고 해서 크게 후유증을 겪은 적이 없었는데, 당연했다. 나는 대회라고 해서 더 열심히 뛰지 않았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나는 대회를 나가서도 늘 '내가 끝까지 다 뛸 수나 있을까?' 하는 불신(?)을 가지고 뛰었기 때문에, 골인지점에 들어가기 전에 길바닥에 나자빠져버리는 상황을 모면하는 것만이 목표였다. 그러니 평소 뛰는 것과 대회를 나가서 뛰는 것이 크게 차이가 없어서 딱히 후유증이랄 것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불을 발견한 원시인처럼(!!) 

대회에 나가서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는, 누구나 다 알던 사실에 뒤늦게 눈을 뜬 나는 올해부터는 대회에 나가서는 평소보다 30초 정도 페이스를 당겨서 뛰기 시작했는데....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끝 모르고 날뛰는 애송이처럼, 나이를 40이나 먹고도 "짜란다 짜란다" 어화둥둥에 올라타 다소 무리를 한 것이 드디어 탈이 났다.... 



브롱스 10마일 대회에서 E그룹 배정 커트라인까지 치고 올라간 것은 엄청난 쾌거였다. 정말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하루를 쉬고, 이틀을 쉬고, 어라... 3일째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몸이 아프네....? 

보통은 하프마라톤을 뛰고도 이틀을 쉬면 3일째에는 뛰고 싶은 기분이 드는데 이번엔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이상한 위치에 물집까지 생겼다. 달리기를 전혀 안 하고 일상생활만 하고 있는데도 그 물집이 다시 커지고, 다시 터지고를 반복하며 속을 썩인다. 



그렇게 3일을 쉬었으니, 7월에 본격적으로 그룹 트레이닝을 시작한 후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 화요일 그룹 훈련도 빠졌다. 그룹 훈련으로 얼마큼의 기록을 향상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 쳐도, 17주 전체 개근은 당연히 할 줄 알았다. 신체적 능력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지만, 근면함은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회 이틀 후, 늘 나가야 하는 시간임에도 나가기는커녕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그런 스스로의 나약함에 많이 실망했고, 대회 후 체력을 회복하는 것도 능력인데 그걸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많이 나기도 했다. 



사실 마라톤 훈련 전체 17주의 과정에서 중반을 지나고부터 체력적으로 부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 뛰는 거리나 강도를 많이 늘린 것도 아닌데, 나라는 인간이 가진 어느 능력 한계점을 넘어가버린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에서 피로함을 많이 느끼고, 어떤 부분은 체력상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 하던 일을 다 하면서, 거기에 추가로 마라톤 트레이닝을 하고, 나름의 좋은 결과까지 내야 한다는 욕심이 생겼었나 보다. 훈련 초반에 급속도로 기록이 좋아지면서 더더욱 과욕을 부리게 되었다. '이대로 가면'으로 시작하는 온갖 달콤한 상상을 하며, 다소 무리를 해왔던 것 같다. 





초심을 잃는다는 게 이런 경우일 것이다.

평생을 달리기는커녕 걷기도 제대로 안 하고 살아왔는데, 어쩌다가 시작한 1분 달리기가 30분이 되고, 하프가 되고 풀 마라톤에 도전하는 중... 어쩌다 보니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어쩌다 보니 운 좋게 기록향상이 되기 시작하면서 재미가 붙었다. 그러다 보니 기록 욕심이 나고, 거리 욕심이 난다. 겸손을 되찾아야 할 시점이다. 



그렇게 마음 시끄러운 3일을 보내고, 목요일쯤엔 아무리 그래도 뛰어야겠다 싶은 찰나에 같이 뛰자는 친구의 연락도 있고 해서 가볍게 3마일을 뛰었다. 아직 근육통이 여기저기 남아있었지만, 딱 그럴 때 뛰는 3마일이 특효약이 아니던가. 

한걸음 한걸음 몸이 풀리고, 구슬땀이 흐르는 느낌. 그래. 이거였지. 이래서 달리기를 하는 거였지. 이 기분이 좋아서 뛰는 거였지. 초심으로 돌아가는 회복주였다.



컨디션이 올라오는 게 느껴져서 금요일에는 1마일 더해 4마일, 속도도 조금 높여서 뛰었고, 주말에는 그룹과 함께 장거리만 뛰면 될 터였다. 다시금 훈련이 정상궤도로 돌아오는가 싶은 그때!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비가 와도 웬만큼 오면 그냥 뛸 텐데 정말 1분도 쉬지 않고 주말 내내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내렸다. 토요일 그룹런이 취소되었다. 창밖을 보면 뛸 마음도 안 생긴다. 



훈련 차트와 일기예보를 번갈아보며 한숨을 푹푹 쉰다. 이제부터 낭비할 주말이 없다. 주말마다 거리를 쌓아야 한다. 20km 뛰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40km를 뛸 수는 없는 법. 차근차근 높여나가야 한다. 한주도 허투루 보낼 수 있는 주말이 없었다. 그런데 비라니!!!

비가 오면 산책을 못 나가 안절부절못하는 대형견의 마음이 바로 이것인가 싶을 만큼 초조해졌다. 이미 마라톤 훈련에 익숙해진 몸은 주말이 다가오니 뛰라고 아우성이다. 다리 근육이 뻑적지근하고, 뭔가 가슴도 답답하다.



토요일을 그렇게 '산책 못 나가 시무룩한 대형견'처럼 보내고, 일요일 아침 기적적으로 비가 조금 잦아들었을 때, 그냥 냅따 달리러 나가버렸다. 비가 오면 맞는다, 신발이 젖으면 젖는다. 그런 마음으로 그냥 나갔다. 이번주 목표 거리는 15마일(약 24km), 다음 주에는 18마일 대회가 있고, 그다음 주에 하프마라톤이 있다. 허투루 할 수 있는 주말이 정말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최장거리는 14마일이었다. 15마일을 한번 뛰지 않고 갑자기 18마일에 도전하기는 부담이 컸다. 이번주에 꼭 뛰어야 했다. 




비도 오는 날에, 혼자서 뛰는 거라 도로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코스는 동네 공원으로 정했다. 동네 공원을 하염없이 뱅뱅 돌며 목표 거리에 도달할 때까지 뛴다. 소위 '뺑뺑이'는 내가 아주 싫어하는 달리기 방식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막상 뛰러 나가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꽤 뛰고 있다. 같은 일정으로 훈련을 하고 있는 우리 런클럽 친구들은 누구나 지금 같은 마음인 것이다. 공원을 4바퀴 반 돌면서 같은 얼굴을 만나고 또 만난다. 두 번까진 반가운데 세 번부터는 그냥 웃겨 죽겠다. 비도 푸슬푸슬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대체 뭐가 잘못되어서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도 달리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어쨌거나 15마일을 뛰었다. 중간부터 비가 내리기도 했고, 추웠다가 더웠다가 날씨가 아주 별로였다. 지난번 14마일을 뛸 때는 크게 어디가 아프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10마일도 안 되어서 무릎이며 발목이 아팠다. 날씨 때문이었는지, 날씨 때문에 신은 신발 때문이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비 오는 날에는 평소 신는 러닝화가 아니라 트레일러닝화를 신는다. 

트레일화는 완전 방수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물이 침투하지 않는 기능이 있어서, 물 웅덩이에 발을 푹 담가가며 뛰어 건너는 정도가 아니라면 비 오는 날에도 양말이 젖지 않는다. 다만 쿠션감과 발목 지지가 조금 달라서 그렇게 편안하지는 않다. (내 느낌상) 



그냥 비오느날에는 아예 안 뛰는 게 최선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앞으로 남은 몇 안 되는 주말과 대회 당일이 날씨의 축복을 받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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