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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Sep 23. 2023

마라톤 훈련 9주 차 - 브롱스 10마일 대회

주중에는 스피드 훈련 1번, 기초 체력 유지 3일, 그리고 주말에는 차근차근 거리를 늘려나가는 것이 앞으로 남은 일정이다. 원래대로라면 14마일을 뛴 지난주에 이어 15마일 이상을 뛰어야 하는 시점이지만, 이번주에는 브롱스에서 열리는 10마일 대회에서 기록 경신에 도전하느라 거리보다는 속도에 집중했다.



화요일 : 800미터 인터벌

몇 주 전에 했던 자갈길 400미터 인터벌을, 이번엔 되돌아오는 구간까지 합쳐서 800미터로 만들어 휴식 5분을 끼워 4번 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한 사람이라서, 이런 인터벌을 하고 나면 집까지는 하염없이 터덜터덜 걸어서 오는데, 이제 개학을 맞이해 버린 어린이의 등교 준비 때문에 걷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러한 사정으로 쿨다운도 힘들게 뛰어오는 것으로 훈련 마무리.



목요일 : 템포 6마일

템포를 8마일 해야 되는데 정말 진부해도 너무 진부한 핑계지만 너무 바빠서 수요일 달리기도 못하고, 목요일에는 6마일만 뛰었다. 보통 나는 템포런을 하면 절반은 9분/마일 속도로 뛰고, 후반은 8분 30초/마일로 뛰는데, 이날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6마일 전체를 8분 30초 페이스로 뛰었다. 일요일에 뛸 10마일 대회에서 목표 속도가 8분 24초/마일 이기 때문이다. 

힘들긴 했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6마일 템포 훈련 종료.



금요일 : 3.25마일 이지런

3.25라는 애매한 거리지만 이건 우리 코치가 짜준 우리 동네 공원 기준의 훈련 프로그램이라서 그렇다. 우리 동네 공원을 한 바퀴 이지페이스로 휙 뛰고 이번주 훈련 종료. 평소 토요일에 장거리주를 하지만 다음날 대회가 있는 관계로 하루 푹 쉬고, 당분충전도 한다고 어렵게 구한 붕어싸만코를 한 개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일요일 : NYRR 브롱스 10마일 대회
E그룹 배정 커트라인 


목표 달성을 위한 꼼꼼한 지형 파악과 마일별 통과시간 표시

이번 브롱스 10마일은 '아마도' 내가 뉴욕시티 마라톤을 뛰기 전 마지막으로 기록을 경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앞으로는 센트럴파크 18마일 대회, 스태튼 아일랜드 하프마라톤이 남아있는데, 18마일은 처음 뛰어보는 장거리이기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고, 하프마라톤은 뉴욕마라톤 한 달 전이라서 체력을 너무 많이 쓰기엔 좀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브롱스 10마일에서 나오는 기록으로 최종적으로 뉴욕시티 마라톤 출발그룹 배정을 받는다는 마음으로, 앞으로는 속도에 욕심내지 말고 거리에만 집중하기 위해 이번 대회에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평소에는 잘하지 않는 지형 파악도 꼼꼼히 했다. 사실 이 대회는 작년에도 뛰어봤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정확히 어느 구간에 오르막이 있고 어디서 체력을 비축해야 하는지 계획을 세웠다. 어느 지점에서 물을 마시고 젤을 몇 개 먹을 것인가도 꼼꼼히 다 정했다. 평소 나는 대회를 나가면 급수대를 2개 날 때마다 목이 마르지 않아도 물을 마셨는데, 생각보다 시간 손실이 크고 그렇게까지 물을 많이 마실 필요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이번대회에 내가 얼마나 진심이었느냐 하면, 볼펜으로 마일별 통과시간까지 팔에 새겼다. (!!) 

이것은 왜 했느냐 하면, 목표 페이스가 8분 24초라는 애매한 숫자라서 암산이 불가능해서가 첫 번째 이유다. 그럼 목표 페이스가 왜 그렇게 애매한 숫자냐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은 바로 10마일을 1시간 25분에 골인하기 위한 평균페이스다. 10마일을 1시간 25분에 골인하면 (정확히는 몇 초 더 여유가 있긴 하지만) E그룹 커트라인에 턱걸이하면서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 나는 올해 6월에 퀸즈에서 "이러다 죽는다" 싶을 정도로 뛰고 2년 동안 갇혀있던 G그룹에서 탈출해 F그룹이 되었다. 그리고 그 F넘버를 달고 브롱스에서 1시간 25분을 끊으면 또 한 번 상위그룹으로 올라가 E그룹이 되는 것이다. 퀸즈에서 기록 경신을 할 때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다시는 기록에 욕심내지 않으리라 다짐 또 다짐을 했지만, 그 후 시작된 마라톤 트레이닝으로 속도와 거리 둘 다 향상되었기 때문에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기록경신에 도전한 것이다. 



시계에 평균속도와 누적시간이 다 나오는데도 팔에다 마일당 속도를 적은 이유는, GPS와 실제 코스가 조금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대회를 뛰면 언제나 시계보다 실제 코스가 길다. 혹자는 탄젠트가 반영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고, 혹자는 GPS의 한계라고도 하고, 혹자는 다른 러너를 제치기 위해 지그재그로 뛴 거리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대회를 나가면 항상! 실제 코스가 더 길다. 

그래서 시계에 찍히는 내 페이스가 8분 24초라고 해서 안심하고 그대로 뛰었다간 마지막에 목표시간은 이미 지났는데 피니쉬라인이 저 멀리 보이는 애석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마지막 200~300미터쯤이야 100미터당 15초 정도로 스퍼트 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이미 10마일을 뛴 상태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1마일당 8분 24초를 정확히 지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게 장거리 달리기다. 마지막에 몇십 초를 줄이는 것은 쉬울 것 같아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10마일이라는 거리 전체에서 10초씩 줄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그게 가능하다. 

그러니 시계에 찍히는 페이스가 아니라, 대회 주최 측에서 꽂아놓은 마일 표식을 통과할 때마다 정확하게 예정된 시간에 통과해야 한다. 만약 목표시간보다 뒤처졌다면 그다음 1,2마일에서 조금씩 줄여야지 마지막에 한 번에 줄이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접어둬야 한다. 그래서 암산이 어려운 8분 24초를 마일별로 계산해 손목에 적어두고 대회날을 맞이했다. 



5마일까지는 정확하게 계획된 시간대로 통과했다. 6마일 지점에서 오르막을 한번 길게 오르고 젤을 먹고 물도 마셨는데, 그다음부터 지형은 평이한데도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심리적인 문제다. 10k 대회든, 10마일이든 하프마라톤이든, 마지막 1/3 구간이 너무 힘들다.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멘털이 약한 것이 나의 특징인지라, "이 정도 했으니 됐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여러 번의 대회를 뛰어보고, 장거리 훈련을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된 부분이다. 알고 있었으니 다행이다. 실력을 향상하는 첫걸음은 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던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6마일 지점에서 힘이 빠질 때 나를 끌고 갈 친구를 미리 섭외해 놨다. ㅋㅋㅋ



6마일 지점에서 합류해 마지막 골인 직전까지 나를 페이싱 해줄 친구가 정확한 시간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 친구는 이 대회를 뛰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미리 와서 기다려주었다) 힘이 빠지면서 호흡을 제멋대로 하기 시작한 내가 평소 버릇대로 입으로 숨을 쉬며 꼴딱꼴딱 넘어가는데, 그게 어찌나 심했는지 지나가던 다른 러너가 걱정해 줄 정도였다. 페이서가 옆에서 박수를 치며 호흡을 맞춰주었고, 들숨을 코로 쉬라고 지겹도록 잔소리를 해준 덕에 7마일 지점을 통과할 땐 호흡을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시점에서 30초가 늦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후 2마일을 15초씩 줄여 8분 9초/마일로 뛰어야 했다. 8분 초반 페이스는 템포런 때도 안 하는 속도라서 심리적 부담이 컸다. 게다가 이미 7마일을 뛴 상태에서는 더더욱 부담스러웠다. 페이서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면서 주의를 분산시켜 내가 체력적 힘듦을 느끼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도록 도와주었지만 9마일 지점을 통과할 때 여전히 조금 시간이 부족했다. 이래서야 1시간 25분에 골인하는 것은 조금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목표고 나발이고 나는 F그룹도 충분히 만족하니 여기서부터 걷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9마일 뛰었는데 1마일 때문에 포기하면 되겠냐?

100번 생각해도 100번 맞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뛴 9마일보다 마지막 1마일이 더 힘들다는 것도, 천 번을 말해도 천 번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뛴 9마일이 쉬웠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충분히 힘들었다. 그런데 1마일을 더 뛰어야 한다고? 심지어 지금까지 뛴 것보다 빠르게? 이미 힘 다 빠졌는데???



그래도 어쩌겠어? 1마일 때문에 포기하면 지금까지 9마일 고생한 게 뭐가 되는데?



반박불가.


그때부터는 옆에서 아무리 무슨 말을 해줘도 정신분산이 안된다. 온몸이 힘든 게 그냥 온몸으로 느껴진다. 그땐 머릿속에서 무한 나누기를 한다. 1마일은 1.6km, 하프마일은 800m, 쿼터마일은 400m.... 이런 의미 없는 나누기를 계속한다. 골인지점이 보일 때까지.



마지막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90도 꺾으면 가파른 내리막이 나온다. 그리고 그 끝에 피니쉬라인이 있다. "여기부터 혼자 뛰어"라는 말을 남기고 친구가 코스에서 나간다. 



피니쉬라인까지 눈대중으로 200미터, 시간은 30초 남았다. 100미터를 15초에 뛸 수 있을까? 난 애초에 안돼 그게... 그냥 다 때려치우고 걷고 싶은데, 그래도 또 해보면 될 것 같기도 하다. 30초 때문에 9.9마일 뛴 걸 포기할 순 없으니까. 그냥 한껏 내달려본다. 에라 모르겠다 마침 내리막이니 나자빠지면 굴러서라도 들어가겠지. 하는 찰나에 퍼뜩 머리를 스쳐간다! 

계산하기 어려워서 잘라낸 몇 초의 여유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1시간 25분 그리고 몇 초가 더 있었던 것이다. 그게 몇 초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최선을 다해서 저기까지 뛰어서 들어가면 E그룹 커트라인에 들어갈 수 있다. 할 수 있다.



골인.

시계 정지.

시간은 1시간 25분 4초.





끊어질 것 같은 숨을 고르며 워크오프를 통과해 물을 받아 마시고 계산기 앱부터 켠다. 



됐다!

E그룹!

해냈다!



와 진짜 이번엔 죽을뻔했다.

퀸즈에서 F그룹 커트라인에 들기 위해 죽자 사자 달렸을 때도 진짜 힘들었지만, 이번엔 더 힘들었다. 다시는 이런 거 하지 말자. 평생 운동이라곤 1도 안 했던 내가 E그룹이라니! 판타스틱이다! 최고다!!! 

물을 몇 잔 더 마시고, 게토레이도 한병 마시니 조금 살 것 같다. 



메달을 받고 양키스타디움 앞 잔디밭에서 런클럽 유니폼을 입은 친구들을 만나 오늘 대회가 어땠다 기록이 어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올해 G그룹에서 시작해 E그룹까지 올라간 나에게 엄청난 축하를 해준다. 취한다 이 기분. 



살면서 우리가 성인이 된 후에는 성취감이라는 걸 느낄 기회가 생각보다 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어른들이 학생 때가 좋다는 말을 했었는가 보다. 공부를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성적이든 자격증이든 무언가를 성취하고 그 결과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 학생 때만 가능했던 것 같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승진, 자격증 취득 등 여러 가지 기회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지겹도록 자꾸만 찾아오던 중간고사 기말고사 같은 기회가 "정기적으로"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달리기에 빠진 것 같다. 

늘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았던 내 인생에, 어제보다 더 먼 거리를 뛰었다는 성취감, 지난번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는 달성감, G그룹에서 F그룹으로, 거기서 다시 E그룹으로 올라가는 성장을 맛보게 해 준 고마운 달리기.




그리고 슬그머니 계산기를 다시 켜본다.

D그룹 커트라인은 몇 초야.....? 



병도 어지간한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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