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보아야 예쁘다, 발리 숲 속 오두막 집 너도 그렇다.
2023년 9월 14일 목요일 일기
요즘 우리가 자주 하는 말 - 한달살기라 다행이야, 정말.
여행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어려움에 직면하곤 한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스케줄이 꼬인다거나, 캐리어가 망가진다거나,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린다던가, 숙소 컨디션이 나쁘다던가 등등. 우리는 그중 낭만 가득한 마음으로 숲 속 오두막 집을 세계여행 첫 숙소로 골랐다가 꽤나 난처한 상황을 겪어야 했다.
오매불망 전세보증보험 결과를 기다리며 세계여행의 첫 한 달을 지낼 발리 숙소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에어비엔비 어플 속 발리 숙소는 낭만적이었고 그 덕에 발리에 대한 기대감은 날로 커져만 갔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숲 속에 있는 듯한 오두막 집이었다. 숲 속 오두막 집에서 한달살기라...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을 떠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오후에는 꽃 냄새를 맡으며 책을 읽고 요가하는 삶을 떠올렸다. 그래, 이게 바로 발리지!
하지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랬나. 우리가 선택한 발리의 오두막 집은 이 명언을 대변하는 듯한 곳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참 아름답지만 막상 직접 들어가 살아보니 비극 그 자체였다. 일단 사방이 뻥 뚫린 샤워실과 화장실이 우리를 맞이했다. 볼일을 보고 있으면 길 고양이가 낮은 담장 위에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샤워를 할 때는 담장 건너편에서 들리는 사람 소리에 누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쳐다보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샤워실 천장은 시원하게 뚫려 있었고, 맑은 하늘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대형 연들이 날아다녔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구멍이 송송난 오두막 벽으로 모기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숙소 내부에 모기장이 있었음에도 여기가 피 맛집이라고 누가 소문을 냈는지 나는 빈혈(?)이 올 지경이었다. 견디다 못해 전기 파리채를 구입해 매일 밤 허공을 갈랐다. 전기 파리채가 지나간 자리엔 콩알탄이 터지는 듯한 파바바박- 소리와 함께 모기의 사체가 쌓였다.
밤이 되면 수많은 달팽이들이 오두막 앞 정원에서 정모를 했다. 걸어 다닐 길을 잃었다. (나로 인해 목숨을 잃은 달팽이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 도마뱀 같이 생긴 또께라는 녀석이 사방에서 또께 또께 울고, 옆집 닭은 새벽 4시부터 꼬옥끼오오오~ 우렁차게도 외쳐댔다. 정원의 꽃 향기를 맡고 날아온 대왕 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가 지내는 오두막에 출석체크를 했고, 나는 그럴 때면 벌을 상대로 공포의 얼음땡 놀이를 해야 했다. 숙소 주변에는 식당이 하나도 없어 모든 식사를 그랩(한국의 배달의 민족)으로 배달시켜 먹어야 했다.
한 일주일 동안은 정말 울고 싶었다. 그럼에도 에어비엔비에 올라와있던 숙소 사진과 실제 모습이 거의 일치했기에 불평할 수 없었다. 다만 한국에서 이 숙소를 예약할 당시에는 내 눈에 '발리 낭만 필터'가 장착되어 있었고, 현실에선 그 필터가 사라졌을 뿐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우린 자연과 하나 되는 숙소가 아니라 평범한 벽과 문이 있는 숙소를 선호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다 운명 같은 날이 찾아왔다. 이제 막 세계여행을 시작했기에 열심히 밖을 돌아다니다, 우리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루 종일 숙소에 머문 날이었다. 오두막 앞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다 오후의 햇살을 마주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자 지붕 끝에 걸려있던 모빌이 움직이며 맑은 소리를 냈다. 해먹에 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해먹에 몸을 맡기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바람 따라 정원의 꽃들이 흔들렸고 살짝 열려있는 뒷문으로 골목길 삼총사 몰리, 볼리, 술리가 들어와 애교를 부렸다. 그날 저녁,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오두막 옆집 2층에서 맥주를 마시며 본 붉은 노을과 정원의 풍경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아마도 그날, 불편함 투성이었던 오두막집에게 내 마음을 연 것 같다. 사방이 뚫린 화장실 마저 아름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변기에 앉아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고, 담장 너머 보이는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이 예뻤다. 종종 놀러 와 빨가벗은 나를 바라보던 고양이가 보이지 않으면 아쉬워 담장에 우유를 얹어놓고 기다리기도 했다.
낭만적인 자연 속 샤워는 이틀에 한번, 해가 뜨면 후다닥 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물도 아끼고 샤워하는 시간도 아끼고 나름 괜찮았다. 전기 파리채를 휘두를 때 콩알 탄 소리가 나지 않으면 괜히 아쉬웠다. 또께가 일곱 번 울면 행운이 온다는 말에 또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랩으로 삼시세끼 미고랭, 사떼, 나시고랭, 나시짬뿌르 등 발리 음식을 모조리 맛보는 일에도 재미를 붙였다.
만약 우리의 여행이 3박 4일이었다면 어땠을까. 숲 속 오두막 집의 진면목을 발견하지 못한 채 '샤워하기 민망하고 벌레가 너무 많아 머물기 힘든 숙소!'라는 한줄평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집주인 빼드로에게도 정말 아쉬운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달을 살며 오래 지켜보니 단점은 점점 잊히고 좋은 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태주 시인의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라는 시구절이 마음 깊이 와닿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우린 한달살기의 팬이 되었다. 앞으로 어떤 숙소를 만나더라도 오래 구석구석 살피며 그곳의 예쁜 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리 오두막 집에서의 마지막 날, 짝꿍과 맥주 한잔을 마시며 입을 모아 얘기했다.
한달살기라 다행이야,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