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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Apr 22. 2024

발리에서 요가 대신 내가 선택한 것

요가도 좋았지만 말이에요.

2023년 9월 19일 화요일 일기

요즘은 행복한 날의 연속이다. 이렇게나 행복했던 날이 또 있었나?


2023년 9월 20일 수요일 일기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는 카페에서 일기 쓰고 책을 읽고, 점심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는 골목길 산책을 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인데도 마냥 좋다.




발리 스미냑에서의 오두막 생활을 마치고 세계여행의 두 번째 장소인 발리 우붓에 도착했다.


발리 한달살기를 결정한 이유 중 하나는 요가하는 삶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스미냑의 숙소는 시내 중심부와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요가원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우붓으로 넘어왔으니 발리 한달살기의 목표를 이룰 시간이 되었다. 부지런히 요가원을 알아봤다. 발리 요가원은 한국의 미용실 마냥 많아 고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무엇이든 가까운 게 최고라는 마음으로 숙소 10분 거리의 요가원을 선택했다.


첫 수업을 위해 요가원으로 향했다. 구글맵은 좁은 골목길 사이의 한 가정집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여기가 요가원이라고? 조금은 의심스러웠다.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마당 의자에는 이외수 선생님을 닮은 남자분이 앉아계셨다. 집주인인가? 그분에게 수업 장소를 묻자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나무에 둘러싸인 대형 정자가 보였다. 새소리와 닭 우는 소리가 배경 음악인 듯 잔잔히 들려왔다. 


잠시 후 요가 선생님이 등장하셨다. 놀랍게도(?) 선생님은 입구에서 만난 이외수 선생님을 닮은 분이었다. 요가 선생님은 고수의 향기를 물씬 나는 펑퍼짐한 흰 바지를 입고 미소를 머금은 채 느긋하게 입장하셨다.


첫 요가 수업은 몸의 동작보다는 호흡 위주의 수업이었다.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길게 내뱉고, 다시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짧고 힘차게 하! 내뱉고. 30년 인생 매일 같이 숨 쉬며 살아온 경력이 무색하게 호흡은 쉽지 않았다. 삼십 분쯤 지나자 호흡과 함께 동작이 시작됐고 내 다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후들거렸다. 그럼에도 송골송골 맺힌 땀을 자연 바람이 식혀주고 나무가 쏴아악-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나니 기분이 좋았다. 수업 중 알록달록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요가 중인 우리를 오래도록 구경하기도 했다. 모든 게 신비로웠다. 이래서 다들 발리에서 요가를 하는구나 싶었다.


대형 정자를 닮은 자연 속 요가원


발리의 첫 요가 경험은 아주 좋았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급작스러운 운동에 놀란 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며칠을 근육통에 시달렸다. 몸이 괜찮아졌을 즈음엔 번번이 새벽 요가 시간에 맞춰 일어나질 못했고 그 이후 요가원을 한번 더 찾는 것으로 우리의 발리 요가 라이프는 막을 내렸다.




요가하러 발리까지 왔는데 한 달 동안 두 번밖에 하지 못하다니... 우리가 너무 게을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는 그저 발리의 요가보다 더 좋아하는 일이 있었을 뿐인 것 같다. 우리의 하루는 한정되어 있기에 마음이 더 가는 다른 일들을 선택했을 뿐이다.


요가와 더불어 우리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것들은 더 있었다. 발리 여행자라면 꼭 해야 한다는 서핑, 섬 투어, 바다 물놀이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발리까지 왔는데 안 하면 손해 볼 것만 같은 일들이다. 하지만 관심 없는 일들을 '여기까지 온 김에...'라는 생각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숙제하듯 여행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여행 유튜버 흉내를 내면서 충분히 깨닫지 않았던가.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해야만 할 것 같은데...'의 늪은 참 깊고 무섭다는 것을. 정신 똑띠 차리지 않으면 금세 또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발리까지 와서 요가 대신 선택한 것은 무엇이었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나 독서였다.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책을 읽는 시간이 좋았다. 스토리가 끊기지 않도록 앉은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것이 좋았다. 소소한 나의 삶을 더 들여다보자면, 나는 카페에서 일기를 끄적이는 시간이 좋았다. 테라스에서 책을 읽다 에어비엔비 주인의 딸 오망 그리고 강아지 그모이, 캔디랑 노는 것이 좋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 집 앞 단골 식당으로 슬렁슬렁 나가 나시고랭과 미고랭을 먹는 것이 좋았다. 쨍한 해를 좋아하지 않기에 아침, 점심보다 저녁에 산책하는 것이 좋았다. 짝꿍과 손 잡고 걸으며 도란도란 얘기하는 시간이 좋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슈퍼에서 망고스틴을 사 와 달달한 맛을 즐기는 시간이 좋았다. 밤이면 나타나는 테라스 천장의 찌짝들을 관찰하는 것이 좋았다.


돌아보니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하루가 어떤 것인지 조금씩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여러 시행착오들은 있었지만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소소해 보여도 우리가 더 원하는 평범하고도 자연스러운 하루를 선택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당시 나의 일기에는 행복하다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고 싶다. 평범해 보일지라도 내가 선택한 것들로만 가득 채운 삶을 살고 싶다.


책을 읽던 카페, 종종 원숭이가 출몰해 음식을 노린다.
이렇게...!


천방지축 오망, 종종 나에게 꽃을 선물해 준 뒤 부끄러운지 바닥에 드러누워 버린다.
귀여운 오망이 준 선물들
테라스로 매일같이 놀러 오던 애교쟁이 그모이와 캔디
캔디는 오망을 피해 우리 숙소 테라스에서 한참을 쉬다 가곤 했다.
옆집에서 놀러 온 강아지 씨뿌
단골 식당 우붓 와룽, 우리의 아침을 책임져 줬다.
매일 먹던 꽃모양의 달달한 망고 스틴
카페, 테라스 어디서든 마음껏 책 읽기


내가 선택한 것들로만 가득 채운 하루를 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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