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냐 하고 싶은 일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2023년 10월 6일 금요일 일기
'돈을 벌자'와 '하고 싶은 일을 원 없이 해보자'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중. 돈이냐 하고 싶은 일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1년간 세계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받는 몇 가지 단골 질문들이 있다. 로또 됐냐, 유튜버 할 거냐 그리고 예산이 얼마냐.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기에 밝혀보자면 우리의 1년 세계여행 예산은 3,000만 원이다.
부부의 1년 세계여행 예산이 3,000만 원이라고 답하면 살짝 의아해하는 반응이 돌아온다. 아마도 예산이 좀 타이트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일 거다. 수많은 밤 계산기를 두드려 봤으니 우리도 그 사실을 몰랐던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획한 세계여행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한 도시에 느긋하게 머무르는 한달살기 여행이었다. 그렇기에 3,000만 원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판단했다. 아니, 가능해야만 했다. 3,000만 원을 한 달 치로 환산하면 월 250만 원. 24년 2인가족 최저 생계비가 220만 원 정도라고 하니 서울살이였다면 빠듯한 예산이었겠지만 동남아시아라면 가능할지도? 긍정회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해 제대로 된 신혼여행도 못 가봤고, 심지어 퇴사까지 하고 떠나는 여행이기에 호화로운 여행을 꿈꾸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세계여행 이후의 삶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예산은 타이트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여행에 올인하느라 한국에 돌아왔을 때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는 상황은 벌어지면 안 되니까 말이다. 잊지 말자. 우리 여행의 목적은 여행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 찾기다!
혹시 1년이 되기 전 예산이 모두 소진된다면 부족한 여행 비용은 여행하는 기간에 번 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이렇게 우리의 세계여행 비용 계획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다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발리 한달살기를 마치고 첫 여행 가계부 정산을 하던 날이었다. 세계여행 전부터 가계부를 쭉 써왔기에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돈이 잘 맞지 않았다. 가계부를 요목조목 뜯어보니 고정비가 문제였다.
고정비는 숨만 쉬어도 꼬박꼬박 나가는 돈이다. 나와 짝꿍의 보험비, 번호를 살려둔 한국 핸드폰비, OTT 구독료, 가족회비 더불어 차마 해지하지 못한 청약과 청년 적금 등이 있었다. 모두 더해보니 우리의 고정비는 100만 원이 넘었다. 세계여행을 준비하며 고정비 다이어트를 그렇게 했건만.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어찌 됐던 고정비를 1년 여행 예산에 포함시키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게 됐다. 한 달 생활비 250만 원에 100만 원 정도의 고정비를 빼고 나니 우리가 실제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돈은 150만 원 남짓. 이미 모든 통장 정리가 끝난 상황인데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비상이다!
우리 가정의 재무부장관인 나는 잔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돈 벌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첫 시도는 구글 애드센스 광고였다. 티스토리 블로그를 만들고 ChatGPT로 온갖 과일과 채소의 효능에 관한 글을 작성해 올렸다. 블로그에 애드센스를 넣는 것이 쉽지 않아 애드센스 고시라고 부른다던데 신기하게 한 번에 통과했다. 티스토리에 쿠팡 파트너스도 연동했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 노마드'를 검색하면 나오는 스마트 스토어, 해외 직구 등등 이거 하면 월천 벌어요!라고 외치는 많은 것들에 기웃거렸다. 나도 월천 벌어야지, 홀린 듯 생각했다.
월천의 늪에 빠져 발리에서 가지의 효능을 적고 있던 어느 날, 문득 현타라는 것이 왔다. 사회에서는 나름 고급 인력(?)이었던 내가 어쩌다 ChatGPT가 써주는 글을 복붙하고 있단 말인가. 어쩌다 돈돈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나. 퇴사와 여행의 목적을 잊은 채 관심도 없는 일을 하며 쉽게 돈을 벌어보려 한 스스로가 한심했다.
조급한 마음을 일기에 털어놓았다. 어지러운 마음을 모두 털어놓자, 적어도 아직은 하고 싶은 일과 돈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겨우 하고 싶은 일 찾기 2개월 차였다. 짝꿍도 돈 걱정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나를 응원했다.
덕분에 돈을 벌기 위해 기웃거렸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가장 좋아하는 일인 독서를 시작했다. 하루 두세 권씩 읽고 싶은 만큼 읽었다. 그러다 기록을 남기고자 자연스레 도서 블로그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일이어서 그런지 책 읽고 블로깅하는데 하루를 꼬박 써도 아깝지 않았다. 책과 함께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발리에서 보냈던 두 달은 세계여행 중 가장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막상 1년의 자유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몰라 헤맸다.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 해놓고 여행 유튜브나 수익형 블로그를 기웃거리며 돈 벌 궁리를 했고, 유명한 여행 코스를 따르지 않으면 손해 보는 거 같아 맞지 않는 여행을 했다. 다행인 것은 이리저리 마음껏 흔들리다가도 결국 내 마음의 소리에 경청했다는 것이다. 세상의 소리가 아닌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첫 연습의 시간이었다.
이제 태국 방콕으로 간다. 발리에서 스스로를 잘 알게 된 덕에 방콕 한달살기에서는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퇴사하고 여행하는 흔한 부부의 여행이 드디어 안정기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