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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Apr 29. 2024

바선생과 함께하는 슬기로운 방콕 생활

사진은 없으니 걱정 마시길!

2023년 10월 14일 토요일 일기

어제저녁, 바선생 50여 마리를 죽이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한테 쫓기는 꿈을 꿨다. 하하.




발리 두달살기를 마치고 태국 방콕으로 넘어왔다. 우리의 방콕 한달살기는 현관문을 기점으로 집안과 밖의 만족도 차이가 아주 컸다. 오늘은 그중 집'안' 이야기를 먼저 해보려 한다.


발리 오두막 집에서 고생한 이후로 숙소 보는 눈이 제법 높아졌다고 생각했다. 에어비엔비 어플에 올라온 사진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리뷰도 꼼꼼히 읽으며 숙소를 골랐다. 우리가 고른 방콕 숙소의 평점은 4.8, 수영장과 헬스장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대단지 아파트였다. 시내 중심과 멀다는 문제를 제외하고는 완벽해 보였다. 실제로 단지 입구에 들어서자 스타벅스와 예쁜 단지 조경이 눈에 띄었고, 호스트 대행인이 엘리베이터 22층 버튼을 누르자 고층 숙소에 당첨됐다는 사실에 두근두근했다. 


그러나 설레는 마음도 잠시, 숙소에 들어서자 망가지기 일보직전인 가전, 가구들과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먼지 뭉텅이들이 우리를 반겼다. 호스트 대행인은 문을 열어주자마자 빛의 속도로 사라진 뒤였다. 세탁기는 도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상판이 망가져 있었고, 찬장 문은 위쪽 경첩이 없어 열자마자 뚝 떨어졌다. 패브릭 소파는 앉고 싶지 않을 만큼 얼룩이 심했고, TV 선반은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모양으로 부서져있었다. 의자는 앉는 부분과 다리 사이에 이음 부분 몇 개가 없어 공중부양 상태였다. 바닥은 차마 청소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세탁기야...




아휴, 아무렴 이런 것들은 이제 우리한테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이 숙소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바선생 대가족'이었다. 바퀴벌레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싫어 이번 글에선 모두 바선생으로 통일했다.


난 바선생을 진심으로 무서워한다. 고등학생 시절 혼자 있던 집에 바선생이 나온 적이 있다. 비명을 지르다 간신히 바선생을 컵으로 가뒀다. 그리고 친오빠에게 울며 전화해 제발 집으로 당장 와달라고 애원했다. 평범한 친오빠를 둔 전국의 여동생들이라면 그에게 전화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지 알 것이다. 난 그만큼 바선생이 무서웠다. 그 이후 한동안 내 몸보다 큰 바선생이 나를 뭉개는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이런 나에게 방콕 에어비엔비 화장실 바닥에 웰컴 서비스로 배를 벌러덩 까고 누워있던 바선생은 충격 그 자체였다. 바선생은 분명 밝거나 사람이 있을 땐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우리 집 바선생은 왜 이리 사교성이 좋은지, 밥을 먹을 때면 나눠먹자며 식탁으로 달려들었다. 심지어 패션에도 관심이 있는지 옷장에 걸린 옷을 꺼내면 내 옷을 탐내던 바선생들이 후두두 떨어졌다. 으, 다시 생각해도 정말 소름 돋는다. 정말이지... 우린 패닉상태였다.


이런 웰컴 서비스는 사양할게요...


방콕 에어비엔비에서의 첫날, 우리는 과장 없이 50여 마리의 바선생을 잡았다. 잡으려고 애쓴 게 아니라 그냥 눈에 띄어 잡은 것만 그 정도였다. 호스트와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연락했다. 그러자 호스트는 에프킬라 하나를 청소 담당인을 통해 보내줬다. 그게 전부였다. 아, 청소 서비스 1회를 무료로 제공해 주겠다고도 했다. 아니, 원래 전혀 청소가 안된 집이었는데 '무료' 청소 서비스를 제공해 준다니 이게 무슨 말인지... 여하튼 호스트의 도움은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사방이 뻥 뚫린 오두막집에서 온갖 벌레들과 함께 한 달을 지낸 사람들 아니던가. 우린 빠르고 철저하게 바선생과 헤어질 결심을 했다. 바로 대형 마트로 달려가 바선생을 죽일 수 있는 온갖 약을 사 왔다. 벽에 붙여 먹이로 유혹하고, 모든 틈에 결계를 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눈앞에 나타나면 뿌려 죽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사 왔다.


뿐만 아니라 물 주머니를 만들어 싱크대와 화장실 하수구를 모조리 막았다. 주방 곳곳 벌어진 실리콘 구멍은 테이프로 꼼꼼히 막았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바로 달려들기에 집에서 밥 해 먹는 것은 아예 포기했다. 밖에서 사 온 음식을 집에서 먹어야 할 땐 먹자마자 빠르게 봉지에 담아 쓰레기 처리장에 버리고 왔다. 우리의 부지런한 노력으로 숙소는 날로 깨끗해져 갔다. 일주일쯤 지나자 우리 집에 놀러 오는 바선생의 수는 하루 한 두 마리 정도로 줄었다. 그렇다, 바선생 대가족과의 영토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한 것이다!


바선생 대가족과의 동침은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으나 나름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다. 그건 바로 이제 바선생을 만나도 더 이상 울지 않는다는 것. 바선생 좀 잡아달라며 친오빠에게 울며 전화하던 과거의 나는 없다. 눈이 마주칠 만큼 큰 녀석들은 아직 좀 어렵지만 아기 바선생쯤은 '귀엽지만(?) 미안~'하며 새침하게 잡을 수 있게 됐다. 바선생을 그토록 무서워했던 내가 방콕의 에어비엔비 덕에 한 단계 레벨업을 한 것이다. 


세계여행을 할수록 우리의 생활력은 날로 강해지고 있다. 이젠 정말 어떤 숙소도 두렵지 않다!


훗, 어떤 숙소든 다 덤벼 보시지!




자, 이제 에어비엔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자. 행복한 방콕 라이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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