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출근을 안해요
2023년 11월 30일 목요일 일기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살고 싶다며 찾아온 커플에게 멋진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그러다 오늘 그들에게 보여줬던 내 모습과 말, 그 모든 게 온전히 내가 아닐까? 싶었다. 부끄러울 필요 없다. 나는 여전히 과정 속에 있는 사람이니까.
나와 짝꿍을 '디지털 노마드 부부'라 칭하며 네이버 블로그에 여행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정의하는 디지털 노마드는 여행하며 노트북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여행만 하면 단순 여행자이고, 노트북으로 일하지만 집을 떠날 수 없다면 노마드라고 말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생활비 전부를 벌고 있지는 못하지만 세계를 떠돌며 노트북으로 이것저것 끄적이는 덕에 아주 조금이라도 수입을 얻고 있었으니 우리를 디지털 노마드라고 생각했다. 수입이 적은 회사원이 있듯 수입이 적은 디지털 노마드도 있는 법이니까.
그러던 어느 날, 블로그에 눈에 띄는 댓글 하나가 달렸다.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살고 싶은 커플입니다. 제가 원하는 삶을 리아 님 부부가 이미 살고 계신 것 같아서 한번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요. 가능하실까요?"
당시 우리는 디지털 노마드의 천국, 태국 치앙마이에서 두달살기를 하는 중이었다. 내가 올린 치앙마이 여행글을 보고 한 커플이 우리를 만나고 싶다는 댓글을 남긴 것이었다. 그들도 치앙마이를 여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여행글을 쓰며 이런 댓글이 달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신기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이 그들이 생각하는 멋진 디지털 노마드의 삶과는 (많이) 다를 것 같아 망설여졌다.
그럼에도 그분들을 만나기로 결정했다. 몇 개월간 대화 상대라곤 짝꿍과 나 서로 밖에 없어 0개 국어를 하기 직전이었다. 이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 나누며 마음과 정신을 환기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여행 중 자신들의 꿈을 이룬 (듯 보이는) 사람을 만나겠다며 댓글을 남긴 실행력 좋은 커플에 대한 궁금증도 컸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한 태국 식당에서 만난 M 커플은 유쾌한 분들이었다. 그리고 이미 유튜브 2만 구독자를 보유한 디지털 크리에이터 커플이었다. 이번 치앙마이 여행도 유튜브 광고비를 받아 온 것이라고 하셨다. 이런 분들이 왜 우리를...? 이라며 마음속 혼란을 겪고 있을 때쯤 질문 하나가 훅- 들어왔다.
"디지털 노마드 장점이 뭐예요?"
우리의 삶을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나 누군가 '디지털 노마드 장점이 무엇이냐?' 딱 꼬집어 물어보니 머리가 하얘졌다. 우리보다 훨씬 잘하고 계신 것 같은데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지? 이분들 앞에서 우리를 디지털 노마드라고 말해도 되는 건가?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래서 디지털 노마드 장점이 뭐지? 등등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중 짝꿍이 먼저 대답했다.
"출근을 안 해서 좋아요."
내가 이어 대답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을 해서 좋아요."
M 커플을 만나고 집에 돌아와 그들과 나눴던 대화를 복기했다.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들에게 '출근 안 해서 좋아요~'정도의 단순한 이야기만 한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컸다. 장점이 참 많은 삶인데 왜 그런 이야기밖에 할 수 없었을까, 생각의 꼬리를 밟다 보니 어렴풋이나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의 삶은 디지털 노마드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 버는 삶'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지털 노마드의 장점을 묻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려웠다.
시간을 돌려 M 커플의 질문에 다시 대답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야지, 생각해 본다.
"디지털 노마드의 장점은 이미 모두 짐작하고 계신 것들이에요. 겉으로 보이는 것들이요. 월요병이 없는 삶(대신 주 7일 일하기도 해요), 늦잠 자도 큰일 안 난다(잔만큼 저녁에 더 일하고요), 만원 지하철 통근 걱정 없다(일하기 좋은 장소를 찾는 고민은 해요), 여행하며 살 수 있다(일하느라 많이는 못해요) 이런 것들이요.
저희에게 디지털 노마드는 그저 일하는 방식 중 하나를 나타내는 단어 같아요.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고, 그 일이 우연히 노트북만 있으면 가능했어요. 그래서 세계여행을 하며 일도 할 수 있었고요. 디지털 노마드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만약 제가 목공예를 좋아했다면 디지털 노마드가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기에 저희가 살아가는 삶은 '디지털 노마드'라는 표현보다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아요.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는 삶의 장점을 물어보신다면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먼저, 누가 시키는 일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에요. 물론 아직 시작 단계이기 때문에 회사 다닐 때 보다 일하는 시간은 훨씬 길어요. 그럼에도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한 시간이기 때문에 그리 힘들지 않아요. 오히려 더 나은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는 일이 더 잘 될까? 고민하는 시간이 즐겁죠. 회사 대표님들이 '일, 일, 일!' 하는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니까 하루종일 일 생각에도 힘들지 않고 재밌는 거죠.
회사 다니던 시절 저는 고민이 참 많은 사람이었어요. 해도 해도 줄지 않는 업무 고민, 함께 일하는 사람과의 관계 고민, 주말만 기다리며 사는 삶이 과연 맞는 것인가? 인생 고민, 돈은 왜 벌어도 벌어도 부족할까? 돈 고민 등이요. 그러던 제가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또 뭐가 있을까? 무슨 일을 신나게 벌여볼까? 오히려 일을 만들 궁리를 해요. 짝꿍이라는 최고의 동료를 얻어 관계 고민은 사라졌고, 회사 월급의 반의 반도 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벌 수 있는 돈의 한계가 없다는 사실에 돈 걱정은 오히려 줄었어요. 주말만 기다리는 삶을 살다 주말이 없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하루하루가 더 재밌고, 미래를 생각하면 막연함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있을지 궁금하고 설레요.
물론, 일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혹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스트레스받기도 해요. 회사라는 울타리가 없으니 이러다 내 인생 망하면 어쩌지?라는 불안한 마음도 문득 들고요. 그럼에도 저녁 산책 시간이면 어김없이 오늘도 행복해!라고 말해요.
어떤 하루를 보냈던 잠들기 전 오늘 하루 참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삶, 이 정도면 아주 괜찮은 삶 아닐까요?"
ps. M 커플을 만난 이후로 블로그에 더 이상 디지털 노마드 부부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혹시 누가 또 나도 잘 모르는 디지털 노마드의 장점을 물어 올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