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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May 09. 2024

5년 전, 치앙마이에서 온 편지

그리고 1년 만에 쓰는 답장

2019년 1월 19일


용감하게 아름다운 많은 것들을

발견하리라 생각했는데,

발견한 것은 제 속에 있는 두려움이었습니다.


- 치앙마이 여행자 D의 편지 중




치앙마이는 나에게 참 많은 인연을 선물해 줬다.


디지털 노마드를 꿈꾼다며 만남을 요청한 크리에이터 커플부터 샤워기 필터 세트를 버블티 한잔에 흔쾌히 넘겨주신 여행자 단톡방의 여성분, 러이끄라통 축제에 동행했던 귀여운 모녀, 수영장 물속에서 만나 추위에 떨면서도 삶을 나눠주셨던 멋쟁이 어르신까지. 모두 한국이라는 포근한 울타리를 벗어나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이기에 그 찰나의 인연이 더 귀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치앙마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은 5년 전부터 치앙마이 한 북카페에서 나를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러이끄라통 축제에서 만난 한국인 모녀를 통해 치앙마이의 반캉왓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반캉왓은 태국의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작은 마을 공동체로 수공예샵, 갤러리, 카페가 모여있는 공간이다. 여행에 도통 관심이 없던 우리였지만 반캉왓의 한 북카페에 한국어 책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세계여행을 하며 책을 읽는 나에게 ebook의 존재는 정말 감사했지만, 그럼에도 종이책의 촉감이 너무나도 그립던 참이었다. 


반캉왓에 들어서자 아기자기한 소품샵들이 우리를 반겼다. 작은 숲 속 마을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조금 걷다 보니 커다란 책장 하나가 보였다. 저기가 바로 한국어 책이 있다는 바로 그 북카페인가? 조심스레 다가가 책장을 살폈다. 그리고 나는 첫눈에 한국어 책을 발견했다. 태국에서 만나는 한국어 종이책이라니,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하나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책장에는 한국어 책이 생각보다 많이 꽂혀있었다. 나는 많은 책들 중 운명처럼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골랐다. 음료를 주문하고 책과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표지 한 장을 넘기자 한국어로 또박또박 쓰인 편지가 나를 맞이했다. 태국 책장에 꽂혀있는 한국어 책에 남겨진 한국인의 편지라니. 반가운 마음에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지만 편지의 몇 줄을 채 읽지 못한 고 목이 메어 결국 편지의 나머지 부분은 눈으로 읽어야 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치앙마이에 혼자 여행을 왔습니다
용감하게 아름다운 많은 것들을
발견하리라 생각했는데,
발견한 것은 제 속에 있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어디서 자라난 건가 생각했습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얼마나 더 자유로웠을지도요.

그래도 오늘,
동행을 구해 용기 내어 이곳 반캉왓에 왔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줄곧 상상을 이야기합니다.
더 자유로운 삶을 위한 상상을요.

마음 안팎에 자기만의 방을 갖고
두려움 없이 더 넓고 크고 멋진 상상들을
이루어내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무사히 용감하고 즐거운 여행 하세요.

2019.1.19 D



나는 왜 이 편지를 끝까지 소리 내어 읽지 못한 채 목이 메었던 걸까.


나는 내가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이라는, 회사라는 익숙한 범주안에 속해있지 않더라도 용감하고 씩씩하게 잘 살아갈 줄 알았다. 세계여행을 하다 보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게 될 줄 알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면 내 안의 숨겨진 빛나는 점들을 잔뜩 발견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나 역시 퇴사 후 여행길에 오르며 가장 먼저 발견한 건 내 안의 두려움이었다. 타인과 조금은 다른 인생을 선택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해 나는 얼마나 고군분투했나.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에 얼마나 많은 두려움을 혼자 속으로 삼켰나. 나를 잠식하려는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그렇게 긴 일기를 쓰고 또 썼나. 그럼에도 행복해!라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마음속 두려움과 싸웠나. 


D의 편지를 읽으며 나의 수많은 시간들이 떠올라 목이 메었다. 


그럼에도 D는 용기를 냈고 동행을 구해 반캉왓에 왔다고 했다. 작은 용기가 만들어준 마음의 씨앗이 그의 손에 있던 책에 편지를 쓸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겠지. 5년 전 반캉왓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으며 두려움을 떨쳐낸 채 넓고 크고 멋진 상상을 했을 그를 떠올려본다. D는 책 속에 쓴 편지가 5년 후 한 여행자의 마음을 울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아무렴, 그의 응원을 받아 무사히 용감하고 즐거운 여행을 하겠노라 다짐했다. 




편지의 끝 부분엔 D의 인스타 계정으로 추측되는 영문이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그의 흔적을 찾아봤다. 그러나 아이디를 바꿨는지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이 글을 적으며 다시 한번 그를 찾아 헤맸고 결국 그의 인스타 계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디엠을 보내볼까 고민하다 이내 마음을 접었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D와 나를 이어주는 것이 책 속 편지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잠시 본 인스타 피드에서도 D만의 단단한 마음이 느껴졌다. 자신이 적었던 편지의 내용 그대로 더 넓고 크고 멋진 상상을 이뤄내며 살아가고 있구나, 싶어 왠지 모를 안심이 됐다. 혹시라도 D가 나의 글을 보게 된다면 이렇게 전하고 싶다. 반캉왓에 책과 편지를 남겨주어 참 감사하다고, 나 또한 D가 살아낼 용감하고 즐거운 인생의 여정을 응원하겠다고.




그날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책 속에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여가를 즐기고, 세계의 미래나 과거를 사색하고, 책을 꿈꿔야지."


D의 편지와 이 문장을 오래도록 붙잡으며 살 것 같다.


반캉왓 북카페의 책장


북카페 카운터에는 산타모자를 쓴 귀여운 고양이가 앉아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여가를 즐기고, 세계의 미래나 과거를 사색하고, 책을 꿈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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