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적으로 훔쳐보기
글을 쓰며 일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나간 일들은 쉽게 잊는 편이라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일기장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일기의 한 문장이 항상 내 글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이유다.
일기는 오래전부터 간헐적이지만 꾸준히 써왔다. 여행을 시작하면서는 더 자주 적었다. 일기장에는 하루 일과를 단순히 주욱 나열하기도 했고, 문득 든 생각 혹은 기억에 남는 문장을 적기도 했다. 가끔 과거의 일기를 찬찬히 읽고 있노라면 모두 내가 듣고 겪은 일임에도 새삼 낯설고 재밌다.
치앙마이 다음 여행지인 동유럽 여행에 관한 글을 적기 위해 어김없이 일기장을 펼쳤다. 그러다 치앙마이 세달살기의 마지막 달인 12월에 적었던 일기를 다시 읽게 되었는데, 모두 세계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적을 수 없었던 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번 모아봤다.
2023년 12월 한 달간 기록한 세계 여행자의 일기장을 당당하게 훔쳐보자.
12월 8일 금요일 - 한 달이라는 시간
언제나 그렇듯 한 달이라는 시간은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길지만 살아가는 이에게는 짧은 시간이다.
12월 9일 토요일 -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
러시아 공습으로 온몸에 화상을 입은 8살 로만 올렉시우가 푸른 마스크를 하고 댄스 경연대회에 참가했다. 로만 아버지의 말. "로만은 푸른 마스크를 끼고 탱고 춤을 추고 있다. 어떤 일을 겪었느냐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중요하다."
12월 10일 일요일 - 회사 밖의 삶
세상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한국에 있을 땐 그것이 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정해준 틀을 벗어나는 게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러나 한번 틀을 깨부수니 더 넓은 세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회사 안에서의 삶이 존재하듯, 회사 밖에도 삶은 존재했다. 여전히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생기 넘치게 살아가고 있었다.
12월 11일 월요일 - 요즘 많이 하는 생각
어떻게 하면 잘 쉴 수 있을까. 잘 쉬는 것도 참 쉽지 않다.
12월 14일 목요일 - 자기 걸음을 걸어라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기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뭐라고 비웃든 간에
- <죽은 시인의 사회> 중
12월 17일 일요일 - 책은 쉼이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나는 쉬는 날 책을 읽었다. 그런데 지금은 매일 책을 읽고 있으니 쉬고 싶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난 또 책을 읽는다. 책은 역시나 쉼이다.
12월 19일 화요일 - 뛰면서 한 별 생각
오전 10시쯤 뛰러 나가면 ㅁ자 단지의 반쪽은 그늘, 반쪽은 햇빛 구간이다. ‘햇빛 구간’은 내가 싫어하는 구간이다. 심지어 약간의 오르막이 있음에도 햇빛을 워낙 싫어하는 나라서 힘들어도 그 구간에서는 뛴다. 햇빛을 조금이라도 덜 맞겠다는 심산이다. 햇빛 구간을 열심히 달리고 나면 상쾌한 그늘 구간이 나온다. 그러면 이제 걸을까? 싶다가도 그늘 구간에는 약간의 내리막도 있고 바람도 시원해서 마저 뛴다. 그러다 보면 또다시 햇빛 구간이 나온다. 그럼 계속 뛴다.
햇빛구간이 인생의 힘든 시기라고 생각해 봤다. 누군가 나를 비웃고 욕하는 그런 시기. 혹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그 구간에 나는 달려야 한다. 천천히 걸어가며 그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햇빛이 너무 뜨겁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달려 그 구간을 벗어나는 거다. 그러면 곧 그늘 구간이 나를 맞이한다.
그늘 구간은 인생의 달콤한 시기라고 생각해 봤다. 스스로 만족스러우며 세상에 인정받는 그런 행복의 구간. 그 구간은 빨리 지나치기엔 좀 아쉽다. 그래서 좀 천천히 가기로 했다. 그래도 마냥 멈춰있을 수는 없다. 뛰진 않더라도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멈춰있으면 언젠가 그늘구간도 햇빛 구간으로 변할 수 있다.
뛰면서 별 생각을 다했다.
12월 20일 수요일 - 진정한 성공이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받는 것,
정직한 비평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이 땅에 잠시 머물다 감으로써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 랠프 월도 에머슨
12월 22일 금요일 - 아침 일기
오전 10시 38분도 아침시간에 껴주는 걸까? 그렇다면 지금은 아침 일기가 맞다. 하루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무엇이든 글을 쓰겠다는 다짐을 지켜내기 위해 노션을 열었다.
요즘은, 머리를 비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글을 촘촘하게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의 흐름을 손가락이 따라잡지를 못하는 것 같다. 그럴 때면 생각을 곱씹고 천천히 타이핑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12월 29일 금요일 - 생각의 끝
23년의 마지막 주를 보내며 이런저런 회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새로 시작한 블로그에 대한 회고, 한 해 동안 읽은 책에 대한 회고, 퇴사하고 세계여행을 떠나게 된 일에 대한 회고 등등.. 결국 생각의 끝은 동일하다.
“맞아, 참 행복한 2023년이었지.”
12월 30일 토요일 - INTJ가 새해를 맞이하는 방법
INTJ가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계획은 필수다. 야구 선수인 오타니 쇼헤이로 인해 유행하고 있는 만다라트. 나도 나만의 만다라트를 채워가고 있다. 힘을 최대한 빼고 목표를 적으려 했지만 결과물을 보니 이걸 1년 동안 다 한다고? 아찔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 1년 동안 이걸 다할 거라고~~~!
12월 31일 일요일 - 즐거운 일
야외 카페에 또 다녀왔다. 요즘 회고를 적느라 읽지 못했던 책들을 몰아 읽고 나니 갈증이 조금 해소되었다. 그중 한 권으로 책덕후가 쓴 에세이를 읽었는데 공감 덩어리라 모조리 북마크를 했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알게 되다니 정말 반가웠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 야외 카페에는 주말이라 그런지 기타를 맨 라이브 뮤지션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그 앞에 앉아 노래를 들었다. 한가로운 자연의 풍경과 그의 노래가 어우러져 모든 게 아름다웠다. 이 장면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아이패드를 꺼냈다. "can’t take my eyes off you~"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다.
오늘 든 생각, 좋아하는 카페에 원할 때마다 갈 수 있는 건 즐거운 일이다.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알게 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아름다운 공간에서 멋진 음악을 라이브로 감상할 수 있는 건 즐거운 일이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의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이렇게 발리 두달살기, 태국 세달살기 총 5개월의 여정을 마쳤다. 다음 여행지는 동유럽. 그전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한국에 입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