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서 즐기는 방'콕' 라이프
2023년 11월 18일 토요일 일기
일 년에 세 달은 방콕에 살아야겠다.
나는 집순이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기보다 집에서 멀리 나가는 것을 싫어하니 '집 근처순이'라는 말이 맞겠다. 대학생 때는 해외에 많이 돌아다녀 친구들과 오랜만에 연락할 때면 '너 지금은 어디 있어?'라는 질문을 단골로 받곤 했는데. 그때 질리도록 돌아다닌 탓인지 대학 졸업과 동시에 나는 완벽한 집순이가 되었다. 국내, 해외여행, 맛집 찾아다니기에 모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한때는 혼자서도 여행을 다니던 나였으니 세계여행을 시작하면 다시 여행 세포들이 깨어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세계여행 3개월 차가 되도록 나의 여행 세포는 감감무소식.
방콕의 숙소는 오히려 나의 집순이 기질에 부채질을 하는 곳이었다. 방콕에서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수영장과 헬스장, 당구장, 코워킹스페이스 등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진 아파트 단지였다. 단지 안에는 먹고, 자고, 일하고, 운동할 수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층에 위치한 숙소는 방콕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뷰를 자랑했기에 집에만 있어도 답답한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집순이가 보낸 방콕에서의 하루는 이렇다. 아침에 눈뜨면 모자를 쓰고 바로 앞동에 있는 헬스장에서 땀을 흘리며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한다. 씻고 난 후 1층 세븐일레븐에서 (태국의 편의점 문화에 감탄하며) 저렴하고 맛있는 아침밥을 먹는다. 배가 든든해지면 헬스장 옆에 위치한 코워킹스페이스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한참을 집중하다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집 앞 단골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후식으로 달달한 얌야이 주스 한잔을 사들고 다시 코워킹스페이스로 돌아온다. 가끔은 썬베드에 누워 수영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는다. 저녁에는 역시나 헬스장 앞에 위치한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다. 한참 수영을 하고 나면 배가 고프다. 단지 내 푸드트럭에서 하나에 300원 정도인 다양한 꼬치와 태국 샐러드 쏨땀, 얌운센 등 야식을 먹는다. 완벽하지 않은가?
하루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먼저, 헬스장과 수영장은 운동 부족이던 우리를 건강의 세계로 인도했다. 평생 헬스장에 발 한번 들여본 적 없는 우리다. 그런 우리에게 수영장 뷰를 가진 헬스장은 운동 욕구를 자극했고 덕분에 매일 아침 꼬박꼬박 러닝머신을 (헉헉대며) 뛸 수 있었다.
수영장은 또 어떤가. 우리는 물에 뜨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심지어 물이 무서워 바다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야외에 위치한 크고 예쁜 수영장은 우리에게 당장 뛰어들라며 유혹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좋은 수영장을 이용해 봐야겠다는 심산으로 유튜브로 수영을 배웠다. 그렇게 우리는 새우 등 뜨기부터 배영, 호텔수영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물놀이가 이렇게 즐거운 것이라니,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되었다.
주 3회 방문하는 단지 내 푸드트럭은 아침부터 나를 설레게 했다. 매번 새로운 푸드트럭이 오기에 오늘은 또 무슨 음식을 먹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어떤 음식을 먹던 1,000원짜리 수박, 망고, 얌야이 주스로 마무리. 한국에선 이런 생과일주스를 마시려면 6,000원은 줘야 할 텐데. 부자가 된 기분이다.
태국 음식도 좋지만 가끔은 다른 음식이 땡기곤 했다. 그럴 땐 마라탕이 최고다. 이웃 주민인 중국 분이 종종 마라탕을 직접 만들어 팔았는데 우린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한국에서 먹었던 그 어떤 마라탕보다 맛있었다. 감사한 마음을 가득 담아 엄치척과 함께 '쎼쎼'를 외치면 그분도 '감사합니다'로 화답해 주셨다.
방콕 숙소의 최대 장점은 바로 코워킹스페이스였다. 나는 하루에 한 권 책을 읽느라, 짝꿍은 기고할 글을 쓰느라 바쁜 시기였다. 그런 우리에게 코워킹스페이스는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아늑한 공간이 되어주었다.
발리에선 집 테라스를 이용하거나 카페에 가곤 했는데 두 장소 모두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집 테라스는 쾌적하고 무료라는 점이 좋지만 바로 옆에 침대가 있다 보니 눕고 싶은 욕구와 싸워야 했고, 카페는 오랜 시간 작업하기엔 눈치가 보였다. 그렇다고 여러 카페에 방문하기엔 비용이 부담이 있었다.
그런 우리에게 단지 내 코워킹스페이스는 비용도 들지 않으며 하루종일 일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다른 디지털 노마드들과 함께 일하며 얻는 동기부여는 덤. 우리는 집에서 만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텀블러에 담아 하루도 빠짐없이 코워킹스페이스로 출근했다.
'김밥 천국'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숙소 3분 거리에 외국인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태국의 작은 식당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김밥천국'이라고 불렀다. 2,500원이면 푸짐하고 맛있는 똠얌누들과 족발덮밥 등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메뉴 중 나는 똠얌누들의 엄청난 팬이었는데, 점심에 먹어도 저녁이면 또 생각이 났다.
사장님은 영어를 전혀 하시지 못했지만 사진 메뉴판으로 능숙하게 주문을 받으셨다. 여러 번 주문하다 보니 ‘마이싸이팍치(고수 빼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센스 있게 고수를 빼주셨다. 음식을 다 먹고 나면 우리는 '아러이(맛있다)'라고 말했고, 사장님은 미소로 답해주셨다. 방콕 마지막날엔 사장님에게 구글 번역기로 우리가 떠난다는 사실을 알렸다. 정말 맛있었다고, 감사하다고 전했다. 사장님과 우리는 서로 합장과 함께 '컵쿤카(감사합니다)'하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숙소와 김밥천국, 우리는 그 사이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방콕 시내를 여행할 생각조차 못했다. 치앙마이로 넘어가기 하루 전 간신히 방콕 시내 여행에 나섰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여행하는 날 폭우가 내렸다. 보통 여행할 때 비가 오면 기분이 좋지 않기 마련인데 집에서 한 달을 푹 잘 지내고 나온 귀한 여행길이라 그런지 폭우 상황도 마냥 재밌고 좋았다.
비를 피하려 눈앞에 보이는 카페로 뛰어 들어갔다. 카페 사장님이 야외에 자리 잡은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셨다. 사장님 덕에 정말 오랜만에 *짝꿍과 함께 찍은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비가 멈추자 하늘엔 예쁜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를 보자 여행은 한껏 더 행복해졌다. 역시 여행은 집에서 푹~ 쉬다 가끔 해줘야 재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짝꿍과 함께 찍은 사진에 대한 TMI
1) 이 사진은 브런치 북 <퇴사 후 여행하는 흔한 부부 이야기>의 표지가 되었다.
2) 짝꿍은 한창 디지털 노마드의 자유분방한 이미지에 심취해 머리와 수염을 길렀으나, 가족들의 무수한 질타로 인해 현재는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방콕에서 보낸 방'콕'라이프는 바선생의 존재를 잊을 만큼 완벽했다.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집 문을 기점으로 5분 거리 안에 있었다. 행복하기 위해 일 년에 세 달은 꼭 방콕에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세계여행을 한다면서 숙소에 콕 박혀있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까운 시간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 나는 안다. 한국을 떠나 이곳에 온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아주 커다란 여행이었다는 것을. 또,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여행의 방법이라는 것을.
오늘의 결론, 집순이는 세계여행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집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