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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렌시아 Aug 19. 2024

일상

수정 없는 의식의 흐름

우유를 마신다. 에어컨이 돌아간다. 남편이 잔다. 아들과 딸은 각자 방에 있다. 난 거실에 있다. 에어컨이 돌아간다. 개구리가 운다. 밖에서 운다. 여름이 안 간다. 비도 안 온다. 여름이 원래 이렇게 길었었나. 덥다. 덥고 덥고 또 덥다. 푹푹 찌는 날씨. 조회 서던 어린 시절, 이 날씨라면 픽픽 쓰러지는 사람 엄청 많았겠다. 옛날이 더 더울까 지금이 더 더울까. 옛날엔 선풍기였고 지금은 에어컨인데. 지금이 더 더울 것 같다. 온난화. 온 지구가 덥다. 94년 여름. 정말 더웠는데. 그때 군대 간 내 남자 친구. 남친이 군대를 간 해라 잘 기억난다. 엄청나게 더웠던 여름이다. 남친이었던 그는 남편이 되어 안방에서 자고 있다. 웃기고 웃긴 알 수 없는 인생. 시간이 왜 이리 빨리 갈까. 30년 세월이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앞으로의 30년은 더 빨리 지나가겠지. 하루 일상을 개미처럼 일하며 앞만 보고 가다 보면 어느새 80세가 되어 있을 것 같아. 내 아이들은 그럼 40대 중후반이겠네. 인생이 덧없다. 카르페 디엠의 그 하루는 좋은 의미이지. 소중한 하루니까.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일 때의 하루는 지루한 느낌이다. 안 좋은 의미로 느껴져. 같은 하루인데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영혼의 갈증을 느꼈던 적이 있다. 가슴이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던 그때. 정말 목마르다는 느낌이 들었지. 그때의 하루는 반복되는 일상의 그 하루였다. 무료하고 견디기 힘든 의미 없는 하루. 그런 하루도 있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흘러 지금이네. 거실에 의자가 많다. 오늘 청소기를 돌렸는데 각 방에 있던 의자들이 다 거실이 나와 있는 상태. 아직 안 들여놨더니 의자가 아주 많다. 한 의자에 양쪽에 마포 걸레 빤 것까지 널려 있다. 나의 일상은 오늘 청소였다. 가스레인지 청소도 하고, 식기세척기도 돌리고, 세탁기도 돌리고. 아침밥도 하고.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잠만 못 잤다. 낮잠을 잔 기억이 언제일까. 낮잠도 못 자고 바쁘게 산다. 주말에 낮잠 한 번 자고 하고 것. 하루가 그냥 가서 아깝기도 할 때 있지만. 그래도 낮잠 자는 맛이 있는데. 그 맛을 못 느꼈다. 최근엔. 나 너무 열심히 일상을 사나. 쉬고 싶다. 우유를 마신다. 고소하고 맛있다. 냉장고에 장미꽃이 있다. 20송이를 샀는데 3송이가 너무 시들시들해서 꽃병에 꽂아 냉장고에 넣었다. 신기하게 생기를 찾았다. 고개가 숙여졌었는데 이제 제법 생기 있다. 어제부터 가족 다 모여 식사할 때, 나 혼자 식탁에 앉아서 뭐 먹을 때 냉장고에서 꽃을 꺼낸다. 밥 먹을 때 기분 낸다. 분홍색 꽃 세 송이를 보며 기분 낸다. 작은 만족감이다. 일상의. 일상이 있으니 내가 숨 쉬고 있는 거지? 숨 쉬고 있으니까 일상이 있는 건가? 냉장고에 가족사진이 붙여져 있다. 우리 아들이 초등학생 때 찍은 사진인데, 저 사진 분위기가 좋다. 우리 엄마도 같이 찍은 사진이라 다섯 명이다. 오른쪽 냉장고 문짝엔 방송 카메라에 찍히고 있는 40대의 나와 아들 딸 모습이 있다. 저건 추억이네. 벌써 한참 전 얘기. 30년 뒤엔 세상이 많이 변해 있을 거야. 그때도 우유는 있겠지? 종이와 연필도 있겠지? 태블릿으로 이렇게 타이핑 치는 것, 그 시기에도 가능할까? 새로운 문물이 아무리 많아도 익숙한 게 편한데. 이래서 노인이 되어가는 거겠지? 변화하지 않으면 노인이 되는 건데, 익숙한 것이 편하다. 지금의 일상과 30년 뒤의 일상이 많이 다를까? 그때도 밥은 먹을 거고, 책도 읽을 수 있을 거고, 글도 쓸 수 있겠지. 밤이다. 밤 12시 19분. 오늘의 일상을 마무리한다. 오늘 내가 보낸 일상이 의자 나열로 흔적 남아 있다. 어순이 웃겨도 그냥 두는 재미. 흔적 남아 있는 의자. 의자가 나열되어 있다. 의자가 여기저기 놓여있다. 청소기 돌린 일상의 흔적. 나름 멋스럽네. 이 일상의 모습이. 우유를 다 마셨다. 이제 잠자는 일상을 하러 가자. 잔다. 자. 자러 간다. 굿 나잇. 의자. 거실. 우유 먹은 컵. 나는 들어간다. 안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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