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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이 Feb 16. 2024

자취의 역사

 내 또래 사람들은 결혼한 사람도 있고, 혼자 사는 사람도 있고, 여전히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여태 부모님과 같이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독립을 꿈꾸고 있다. 나이가 서른쯤 먹고 부모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잔소리도 참아야 하고 부모님에게서 사생활을 지켜야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쉬이 독립을 결정하지 못하는데, 거기엔 돈이 가장 큰 요인일 터이다. 아무래도 부모님과 함께 살면 월세도 아끼고 부가적인 식비 같은 것도 들지 않으며, 식사와 청소도 부모님이 해결해 주시니 말이다. 그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십분 이해하지만, 프로 자취러였던 나로선 자취를 적극 찬성한다.

 자취의 장점을 나열해 보겠다.

 첫째, 부모님과의 독립이다. 찰리 채플린은 말하였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부모님도 마찬가지이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아야 희극이다. 가까이 있으면 필히 싸울 일밖에 없다. 부모님 입장에서 생각해도 속이 상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똥 닦아주며 키워놨더니, 다 커서 바락바락 대들기나 하니 말이다. 자식 입장에서도 이제 더 이상 애도 아닌데, 애 취급하며 이래라저래라 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못마땅할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서로의 니즈를 충족할 만한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떨어져 사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가끔 보면 애틋하기도 하니 떨어져 사는 것이 상책이다.

 둘째. 외로움에 내성을 가지는 것. 여기서 말하는 외로움은 짝을 찾지 못한 외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겪게 되는 순수한 외로움이다. 혼자 살면 정신적으로 기댈 곳이 없어 힘들 때가 많다. 부모님은 마치 자전거의 보조 바퀴가 되어, 내가 이리저리 휘청거리지 않도록 도와주시지만 독립하게 되면, 정신적인 고통도 홀로 감내해야 한다. 허나 혼자 살아봐야 외로움을 안다. 외로움을 안다는 것은 홀로 있는 나의 모습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술이 오크통에서 숙성이 되듯이 이 외로움을 견디다 보면 그 사람의 매력을 만들어 준다. 

 마지막으로 금전적인 요소를 말할 수 있다. 자취하는데, 왜 금전적 장점이 있다는지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테다. 실제로 자취하면 정말 이것저것 돈이 많이 나가게 된다. 월세부터 관리비, 식비, 의류, 샴푸, 칫솔, 퐁퐁 등등. 혼자 살다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돈이기 때문에 돈 나갈 구멍이 너무나 많다.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한 달 생활비가 1백만 원 정도는 나올 테다. 거기다 월세까지 더하면 살아가기 정말 빠듯하긴 할 터이다. 허나, 부모님과 같이 사는 사람들은 중 1백만 원씩 적금 드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 별로 없을 거라 본다. 돈은 쓰는 만큼 벌게 되는 법이다. 또한, 혼자 살아봐야 돈 아낄 줄 알게 되고, 허튼 데 돈을 안 쓰게 된다. 그러니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자취를 하는 것이 돈을 더 버는 법일 것이다.

 이번 글에는 내 자취의 역사에 대해 써보려 한다. 나는 자취 경력이 10년은 되기에 꽤나 풀어낼 이야기가 많기도 하겠지만, 기억도 풍화가 되는지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이야기보따리가 주는 걸 느낀다. 이렇게 가다간 모든 기억을 잊을까 봐, 이번 기회에 기록하려 한다. 단편적인 기억을 끌어모은 것이라, 글의 맥락이 중구난방일 수 있다는 점 미리 말씀드린다.


일단 고등학생 시절 기숙사 생활한 것부터 이야기하겠다. 기숙사가 자취라고 말하기엔 애매하지만, 부모님 곁을 떠나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이니 포함하려 한다. 학교는 걸어서 40분 정도 걸렸고 버스로 다니면 20분이면 갈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 정도 거리면 기숙사 생활을 할 정도로 집이 멀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기숙사 생활을 택하였다. 

 그 시절 나는 냉전 시대 같이 심각하고 중대하지만 은밀하고 조용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돈 버시느라 무척 바빴고, 나는 원하는 만큼 관심을 받으며 자라지는 못하였다. 휴가철이 되어도 어디 여행 가는 것도 드문 일이었고, 가족끼리 밥 한 끼 하는 것도 어려웠다. 따뜻한 말 한마디 듣는 것도 어려웠고, 집은 다들 잠만 자러 들르는 곳과 같은 곳이었다. 왜 우리 집은 교과서에 나오 듯이, 동화책에 나오 듯이 화목하지 않은 것일까? 이제 다 큰 마당에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 힘든 시절을 버티기 위해 애쓰셨던 부모님이 이해가 가지만, 어린 시절에는 겉만 늙었지 속은 여리디 여린 아이에 불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프로이트의 책을 읽다 깨달았다. 프로이트의 책에선 뭐든지 ‘섹스’와 연결했다. 외로움도. 자괴감도. 소심함도. 사랑도. 모두. 가솔린 엔진이 흡입, 압축, 작동, 배기 과정을 거치며 작동하듯, 감정이란 것이 기계적인 논리의 과정을 통해 발현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이란 것은 동화나 교과서에 나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인 줄 알았지만, 차갑고 딱딱하고 가솔린 엔진 같은 것이구나. 삐뚤어진 나는 실존주의 철학책과 허무주의 책들을 마구 읽어대며, <사랑은 가솔린 엔진 설>이란 개똥철학을 더욱 완곡히 굳혀갔다.

 그 시절 나의 꿈은 그때부터 줄곧 영화감독이었다. 쉬는 날이면 아버지의 필름 카메라를 들고나가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 카메라는 누나가 태어나던 해에 산 것이라 나보다 4살 많은 카메라이다. 아버지는 그 사진기로 나와 누나를 찍어 왔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자신의 첫 아이가 신기하였는지 누나의 사진은 특히나 많았는데, 그에 반해 두 번째로 태어난 나는 감흥이 덜 했는지 누나 사진의 반의반에 불과하다.

 나는 거리로 나가 그 카메라로 떨어진 담배꽁초, 낡은 기와, 테이프 자국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전봇대 등   낡고 하찮은 것들을 찍으며 그 속에서 예술성을 찾으려 했다. 으레 젊고 서툰 예술가들이 하는 ‘폐허에서 예술성 찾기' 같은 행위였다. 하지만 정작 사람은 찍지 않았다. 일하고 있는 어머니. 등산을 하는 아버지. 만화책을 보던 누나. 어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노인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 모두. 왜냐면 <사랑은 가솔린 엔진 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때의 나는 사람이 아름답다란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집의 선반에 잘 모셔져 있다.) 

 기숙사에서는 3명에서 4명 정도가 한 방에서 지냈다. 방에는 2층 침대가 3개씩 있어서 4명이 한방에 자게 되면 한 명은 필히 2층에서 잤다. 2층 침대에 대해 로망이 있는 아이들은 처음엔 2층에서 자곤 했지만 이내 후회했다. 그 시절 여름엔 에어컨이 없었기에 선풍기를 틀고 잤는데, 천장에 달린 선풍기 바람은 2층에 잘 닿지 않아 무척 더웠다. 그리고 나무로 된 사다리를 밟고 내려가는데, 딱딱한 바닥에 잘못 착지라도 하면 발바닥이 찌릿찌릿하였다. 침대는 쿠션감이 없이 엄청 딱딱했고 좁은 싱글 침대였다. 하지만 우리는 밤에 불을 끄고 수다를 떨다 보면, 가끔은 한 침대에서 두 명이 누워 자기도 했었다.

 기숙사에서 사는 것은 꽤 괜찮았다. 일단 야자(야간자율학습) 시간 때, 일반 학생들은 교복을 입은 체 교실에서 공부를 했지만 기숙사생들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기숙사에 딸린 자습실에서 따로 야자를 할 수 있었다. 기숙사생들 전용 자습실은 사감 선생님 한 분이 관리를 하였다. 사감 선생님은 스킨헤드에 늘 목검을 들고 다녔다. 목검으로 애들을 때리는 걸 본 적은 없으니, 위압용이었으리라. 그리고 사감 선생님은 입이 걸걸하기도 하여 욕도 많이 하였기에, 아이들은 사감 선생님을 무서워했다. 들리는 소문으로 누군가 사감 선생님이 홀로 샤워를 할 때 그의 심볼을 봤다는데, 과연 무서울 만했단다. 허나, 그런 사감 선생님마저도 혼자서는 그 기숙사생 전부를 꼼꼼히 관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고 싶을 때는 사감 선생님에게 감기에 걸렸다고 보고만 하고선 방에 가서 쿨쿨 자곤 했다. 때론 밤에 몰래 학교 밖으로 나가서, 학교 뒤에 있는 조그마한 산(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오르는데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에 산책하러 가기도 했고, 시내까지 30분 정도 걸어서 분식집에 가거나 동전노래방에 가곤 했다. 겨울에는 학교 앞에 있는 풀빵 아주머니께 풀빵을 사곤 했는데, 한 개에 50원에 파셔서 엄청나게 많이 먹곤 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급식은 정말이지 엄청 맛있었는데, 특히나 방학 같이 기숙사 생들만 학교에 남아있을 때, 영양사 선생님은 우리들만을 위해 진짜 엄청나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셨다. 한창 먹을 나이인 우리는 늘 배 터지도록 먹어 대서 살이 다들 포동포동 쪘었다. 

 기숙사에서 살면서 친구들과 늘 밤마다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차피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같은 학교에서 같은 일상을 보내고, 같은 시간에 누웠을 텐데, 그때의 우리는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을까. 

 그리고 고3이 되었다. 나는 기필코 마산을 벗어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하루에 4시간씩 자며 악착같이 공부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능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나는 대학 욕심이 그렇게 많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서울은 가고 싶었다. 다만, 말아먹은 수능 성적으로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원한 곳 중 한 곳은 광탈, 한 곳은 합격은 했지만 경기도 쪽이었고, 한 곳은 후보였다. 그래도 경기도 쪽으로는 대학을 가니, 소정의 목적은 이루겠지만 그래도 서울에 대학을 가길 바랐다. 그리고 며칠 후, 아침 9시에 집에서 피파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02’로 시작하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경상도에서 사는 사람은 알겠지만 02가 앞번호인 전화는 거의 광고 전화여서 받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전날, 추가 합격 번호가 나의 추가합격 번호의 앞에서 끝난 것을 알았었고, 그런 타이밍에 ‘02’로 시작되는 번호로 나에게 전화가 온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렇게 전화를 받았고 역시나 합격 전화였다.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였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아버지와 누나, 나 세 명이서 서울에서 지내게 될 자취방을 보러 오기 위해 서울로 왔다. 왜 누나까지 왔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내가 다니게 될 대학교는 고향에 있던 고등학교 뒷산보다 더 큰 언덕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거리에는 매연인지 뭔지에 의해 검게 때가 탄 눈이 쌓여 있었고, 학교 앞에서 연거푸 담배를 피워 대는 학생들이 있었다. 좁디좁은 골목길이 즐비하고 제대로 된 평지나 공원 하나 없는 삭막한 동네였다. 그런 모습은 내 고향 마산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위화감이 없었다. 부동산을 통해 자취방을 둘러보던 중, 신식은 아니지만 좀 넓은 원룸을 택하였다. 그것이 나의 첫 자취방이었다.

 내 생일날, 집에서 아침밥으로 미역국을 먹고선 상경을 하였다. 그리고 내가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지만 이날은 선명히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다. 첫 자취방의 침대에 누워 바라본 천장. 텅 빈 천장을 바라보며 ‘이제 시작이구나’라고 생각하는 나였다. 


*

 첫 자취방은 가격 대비 상당히 좋은 곳이었다. 8평 정도 되어서 원룸치고 괜찮은 평수였고, 침실과 부엌이 분리되어 있기도 했으며 전자레인지, 가스레인지, 세탁기, 침대, 책상, 에어컨 모든 것이 옵션이었다. 게다가 베란다까지 딸려있어서 난방에도 좋았고 담배 피우기에도 아주 좋았다. 그래서 그런 걸까. 학기가 시작하고 내 집은 이내 모든 이들의 만남의 장이 되었다. 사람들이 내 집에 하도 오다 보니, 나중에는 귀찮아서 내 집 비밀번호를 다 공유해 줬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집에 오기도 전에 미리 들어가 있기도 했고, 미리 온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해서 종종 집에 가면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곤 했다. 무례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수줍음 많던 그때의 나로서는 꽤 유쾌한 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우리 집에서도 자기도 했다. 그땐 아무리 선배들이라도 끽해야 20대 중반의 돈 없는 학생이라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면 잘 곳이 필요하였다. 나도 오는 사람 막지 않는 스타일이라, 기꺼이 재워주었다. 어떤 날, 어느 선배가 우리 집에 자러 왔고, 먼저 누워있던 선배 옆으로 자연스레 나란히 누웠다. 기숙사 때부터 좁은 침대에서 같이 딱 붙어서 자곤 했던 나는 그게 크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 이렇게 같이 자는 거야?’라고 말하는 당황한 선배의 표정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좀 창피하다.

 홀로 집에 있을 때면 친하게 지냈던 두 누나들이 나를 밖으로 불러내, 동네에 있던 세븐일레븐 앞 테이블에 앉아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우리는 세븐일레븐에서 하도 자주 만나서 우린 그 세븐일레븐을 ‘세일'이라고 줄여 부르곤 했다. 우린 세일에서 자주 만나 술을 마시곤 했다. 나는 KGB라는 맥주가 달달해서 좋아했지만 4,000원이나 해서 자주 먹지는 못했다. 우리는 거기서 영화에 대해 자주 이야기 했었다. 어찌 보면 가장 순수하게 영화를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한밤중에 삘이 꽂혀서 주위에 자취하던 애들을 모아 좀비 영화를 찍기도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 이야기들은 담배 연기처럼 날아갔지만, 그 열정은 뜨겁게 불씨가 남아 여태 남아있는 듯하다.


 아 담배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나는 20살 초반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어느 날 학교 선배의 영화를 돕다가,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 홧김에 담배를 샀다. 내가 산 담배는 세일에서 자주 만나던 두 누나 중 한 명인, 솔이 누나가 피우던 말보로 플레이버 플러스(그 당시에는 말보로 실버였을 거다)란 담배였다. 나는 신사의 한 골목길 가생이에 쭈그려 앉아 피웠다. 첫 담배의 맛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오줌 지린내 맛이었다. ‘뭐야 별거 없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머리에 뽕이 걸려 비틀거렸다. 한동안 똑바로 걷기가 참 힘들어, 차에 치이지 않으려 무척 애썼다. 그 후로 집 안에서만 유희로써 종종 피워댔다. 끽해야 하루 세 개비 정도 폈을 거다. 그러다 점점 담배양은 늘어서 하루에 반갑 정도 피게 되어, 유희를 넘어 습관이 되었다. 그해 여름 MT에서 솔이 누나는 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솔이 누나는 내 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뭐 하냐 너'라고 단호히 말하더니, 다짜고짜 내 뺨을 쳤다. 그렇다고 왜 때리냐고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원래 술 마시고 내 뺨을 자주 때리곤 했으니 말이다. 술버릇이 고약한 인간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솔이누나가 내가 담배 피운 걸 알고선, 나한테 담배를 가르쳐줬다는 죄책감에 울었다고 한다. 좀 마음이 찡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그 뒤로 같이 신나게 자주 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그다음 해 21살 생일에 알바하고 있던 나에게 솔이 누나가 집에 언제 오냐고 자꾸 연락이 왔다. 나는 왜 자꾸 물어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자정을 넘어서야 집에 도착하였는데, 솔이 누나와 친구A가 내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미역국과 제육볶음을 차려주었다.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내 집의 비번을 치고 들어와서 몰래 준비를 한 것이다. 국간장이 없어서 진간장으로 간을 맞추는 바람에 미역국이 좀 시커멓던 게 생각난다. 그때 솔이누나와 함께 미역국을 차려줬던 친구A는 10년이 흘러 결혼도 하였다. 시간이 참 빠르다.

 학교의 과제 중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보기'라는 과제가 있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이란 촬영적인 것이든, 내용적인 것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처음 죽으러 가기'란 주제로 촬영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진짜로 목을 맨다든지, 연탄불을 피워 자살하는 것은 아니었고, 땅을 파고 안에 들어가서 나를 묻으려 했다. 대신 얼굴까지 다 묻으면 진짜로 죽으니, 파이프를 통해 숨 쉴 수 있게 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려면 나를 땅속에 묻을 사람이 필요해서 솔이 누나를 불렀다. 그렇게 솔이 누나와 함께 삽을 들고 학교 근처의 산으로 향하였다. 우리는 가는 길에 별의별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솔이 누나에게 다시 태어나면 어디서 태어나고 싶냐고 물어보았고, 솔이 누나는 고민하였다. 나는 티베트에선 일처다부제라고 말했더니, 다음 생에는 티베트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누나는 낄낄거리며 대답하였다. 그렇게 걸어 걸어, 산자락에 도착하였다. 딱히 사전에 알아보지는 않아서 사유지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절 나는 그런 걸 미리미리 찾아볼 정신머리 있는 놈은 아니었다. 아무튼 우리는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삽질은 커녕 운동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나약한 인간이었고, 솔이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누아르 영화에서 깡패들이 사람 하나 묻으려고 땅을 팔 때처럼 순풍순풍 잘 파질 줄로만 알았건만, 삽질이란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렇게 낑낑 삽질을 30분 정도 했을까. 기껏해야 정강이 정도 깊이 정도 파내는 데 그쳤고, 나를 묻을 정도로 파내려면 아마 밤은 새워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그냥. 포기했다. 결국엔 처음 죽으러 간 날이 아니라 처음 삽질하러 간 날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걸 편집해서 수업 시간에 틀었더니 꽤나 반응이 좋았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면 보곤 한다. 


*

 이 집에서 한 1년 정도 넘게 살다가, 어느 날 누나가 상경을 하며 같이 살게 되며 이사하게 되었다. 누나랑 같이 살아야 하기에 좀 더 넓은 집을 구해야 했고, 그래서 방 3개짜리 반지하 집으로 이사를 갔다. 이곳에서 누나와 함께 살긴 했지만, 나는 워낙 학교생활 때문에 바빠서 누나랑 생각보다 마주칠 때가 많지가 않아 딱히 같이 산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나가 뜬금없이 안산에 취직을 해버리더니, 집을 떠나 버렸다. 덕분에 나는 꽤 넓은 집을 혼자 쓰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 나는 너저분한 놈이었기에 방 3개라고는 해서 딱히 요긴하게 이용하지도 않았다. 귀찮아서 제일 큰 방 안에 필요한 짐을 때려 박았고 나머지 방은 전날에 입은 옷 내팽개치는 곳이었다. 집은 치우지도 않아 방구석에 썩어 녹색이 된 포카리스웨트가 나뒹굴었고, 냉장고에 둔 감자는 오래 방치한 덕에 싹이 문틈을 비집고 솟아 나왔다.

 나는 1학년 때부터 영화 촬영 현장에서 동시녹음을 하다가 문득 사운드 믹싱까지 배워보고 싶다는 열의가 생겨, 그 당시 유튜브도 없던 시절에(있었겠지만 유튜브에 강의가 있을 정도로 활발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도서관에 가서 사운드 믹싱 관련 책을 사서 공부하기도 하며, 선배들이 작업한 프로젝트를 열어 분석하면서 공부하였다. 1학년치고 꽤 잘하긴 하였다. 선배들에게 내가 꽤 잘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너도나도 나에게 사운드 믹싱을 부탁하였다. 선배들의 부탁에 거절을 잘 못하기도 하였고, 자존감이 낮았던 그때는 나를 인정해 주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기에 모든 일을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건강을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하루에 적어도 9시간은 믹싱실에서 사운드 믹싱을 했는데, 여기에 수업까지 들으려면 나는 매일 쪽잠을 자곤 했다. 

 어느 날 늦은 아침에 잠에서 깼다. 그날도 아마 밤새 믹싱을 하느라 밤늦게 잠을 잤을 것이다. 어렵게 눈을 떴더니 어딘가에서 ‘쏴아'하는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때는 하도 사운드 믹싱을 많이 하다 보니 이명이 종종 들리곤 했다. 하지만 이것은 이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소리의 발원지를 향해 가보니, 베란다에 있는 수도꼭지가 터져 ‘솨아솨아'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필이면 며칠 전에 영화 보러 갔다가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바람에 현금도 카드도 없었다. 집주인에게 연락하여 처리를 하면 되었지만, 이 지저분한 집을 들키기 싫은 마음에 혼자서 조용히 처리하리라 마음먹었다. 일단 카드를 만들기 위해선 신분증을 만들었어야 했고,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선 사진을 찍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에겐 현금이 한 푼도 없었기에 나는 친구B에게 전화를 걸어 사진을 찍게 오천 원만 빌려 달라고 했다. 친구B는 한겨울에 수도가 터져 홀로 어떻게든 물을 막아보겠다고 사투를 벌여, 물 범벅이 된 채 돈 구걸하러 다니는 내가 안쓰러워서 만 원을 주었다. 나는 오천 원으로 사진을 찍고 남은 돈으로 담배를 샀다. 나에게 만 원을 주었던 친구B는 10년 뒤에 결혼을 했고 나는 거기서 부케를 받았다. 


 어느 날 또 갑작스레 이사를 하게 되었다. 군대 갈 나이였던 나는 언제 군대를 가게 될지 알 수가 없었기에, 나는 보증금이 딸리지 않은 고시텔로 가게 되었다. 그 집은 내가 살던 집 중에서 가장 작은 집이었다. 누우면 벽에 발이 닿고 문에 머리가 닿았기에 살짝 비스듬히 누워 자야 했다. 한 뼘짜리 창문이 하나 나 있었으며, 그마저도 복도 쪽으로 나 있었기에 불을 끄면 낮에도 깜깜했다. 방음은 아예 되지 않아서, 옆방에 카톡 울림이 울리면 내 것인 줄 알고 확인한 적도 있었다. 부엌은 공동 부엌이었기에 요리해 먹는 것은 힘들었고, 대부분의 식사는 오징어 짬뽕 작은 컵으로 때웠다. 

 그 고시텔의 위층에는 솔이 누나가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서로 방을 오가며 왕래하지는 않았다. 일단 내 방은 두 명이 들어올 정도로 넓지 않았고, 솔이 누나 방은 아무리 친하다 해도 여자 방에 들어가기는 좀 뭣하긴 했다. 내가 누나 방에 간 것은 총 세 번인데, 술 취한 누나를 방에 넣어주러 두 번, 그리고 한 번은 바퀴벌레 잡아달라 해서 들어간 적 한 번이 전부이다. 우린 그저 담배 피울 때만 만났다. 내가 사는 층에 흡연구역이 있어기에, 솔이누나는 담배 피우러 갈 때 나를 불러 같이 담배를 피우러 갔다. 담배를 같이 피운다고 달리 무슨 대화를 한 건 아니다. 내가 친근하게 말 거는 성격도 아니고 솔이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그저 담배 피우고 짧은 인사를 하고 각자 방으로 향했다.


*

 그 뒤로 나는 마침내 군대에 갔다. 군대 이야기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퍽 재미있으니 최대한 축약해서 풀어보겠다.

나는 K9 포병으로 입대를 하였고 K9이 신식 화포이니 부대도 최신이지 않을까 기대를 하였다. 훈련소 마지막 날, 자대 입소를 하기 위해 군단에서 온 5톤 트럭에 탑승하였다. 5톤 트럭엔 수많은 훈련병을 태우고 이곳저곳 부대들을 누비벼 훈련병을 내렸다. 신식 부대에서 내리는 훈련병들을 보면 ‘와 부럽다'라고 생각했고 구식 부대에서 내리는 훈련병들을 보며 ‘ㅋㅋ 나는 아니군'이라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곳저곳 쏘다니다가 결국 나와 내 동기만이 남았다. 점심 먹기 전에 출발한 터라 배가 무척 곯아있었고 철원의 찬바람은 너무나 추웠다. 거의 저녁때가 다되어야 마침내 부대에 도착하였다. 아쉽게 그렇게 신식은 아니어서 실망하였다. 위병소에서 잠시 대기를 하였는데, 그곳에서 근무 중이던 병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병장은 부대를 묻더니, 자신과 같은 부대가 아니라며 편하게 하셔도 된다고 했지만, 나와 동기는 얼어붙어서 꼬박꼬박 ‘다'나 ‘까'를 사용하며 대답하였다. 알고 보니 정말로 편하게 대해도 되는 사이긴 했다. 우리는 또 어디론가 인솔되어 대대의 대장인 대대장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다시 5톤 트럭에 탑승하였다. 포대는 중대마다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나의 부대를 가려면 또 이동을 해야만 한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곳은 정말 맨땅에 건물이 딸랑 하나 있는, 누추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아마 아버지가 군생활했을 시절의 막사와 별 차이 없었을 것이다. 행정반을 중앙으로 양쪽으로 생활관이 하나씩 있었다. 한 생활관에 25명 정도가 같이 생활하기 때문에, 신병이었던 내가 뭐 하나라도 잘못하면 수많은 선임들의 갈굼을 받아야 했다. 샤워실에는 샤워기가 10대 정도는 있었지만, 4대 정도만이 제대로 작동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고장 나 있었다. 짬이 없는 애들은 샤워기 하나 차지하기 힘들어서 머리에 샴푸 거품만 낸 채로 샤워실을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아량 넓은 선입 한 분이 호의를 베풀어 샤워기를 주면 그제야 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3월쯤 막사를 리모델링한다고 반년 정도 컨테이너에서 생활하였다. 3월부터 컨테이너 생활을 시작했는데, 철원의 3월은 여전히 추웠다. 보온을 위하여 컨테이너 바닥에 열선이 깔려 있었지만, 화재의 위험성 때문에 못 틀게 하였다. 덕분에 완연한 봄이 오기 전까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곳에서 애써 잤다. 그리고 샤워장 컨테이너에는 샤워기는 13대 정도로 기존보다 개수는 늘었지만, 서너 대를 제외하고선 대부분의 샤워기에서 전기가 통하였다. 멀쩡한 샤워기는 당연히 선임들 차지였다. 특히나 손잡이 부분에는 크게 전기가 올랐기에 물을 틀고 끄거나, 온도를 바꿀 때는 슬리퍼를 이용하여 조절하였다. 그 시절 샤워는 늘 짜릿하였다. 

 다시 겨울이 올 때쯤에 신 막사가 완성이 되어 컨테이너 생활은 끝났다. 신 막사로 바꿔졌지만 사실상 별로 바뀐 것이 없으므로 이만 군대의 주거공간 이야기는 끝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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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역을 하고, 시즌 2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다. 나이 먹고 부모님께 부담 주기 싫어서 작은 고시텔로 이사를 갔다. 그 고시텔도 작긴 작았지만, 군대 가기 전에 지냈던 고시텔보단 한 평수 정도는 더 컸다. 게다가 나름 주방도 있고 드럼 세탁기도 있고 있을 건 다 있었다. 단, 화장실 문이 투명이어서 손님이 화장실을 쓸 때면,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필사적으로 모른 척해야만 했다. 그곳엔 침대를 둘 수가 없어서 얇은 매트를 깔고 잠을 잤는데, 겨울에는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고 자면 정말 찜질방이 따로 없었기에 참 좋았다. 그리고 난 어지간하면 집 밖에서 지냈기에 집이 그리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학교가 걸어서 5분 거리이기도 했고, 난 컴퓨터도 없었기에 컴퓨터를 사용하러 학교의 편집실에 자주 가곤 했다. 한밤중 아무도 없는 과방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시사실을 빌려 영화를 보기도 하였다. 학교는 나의 놀이터 겸 작업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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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흘러 대학 졸업을 하였다. 내가 살던 고시텔은 일하러 다니기에는 교통이 너무 좋지 않아 이사하는 것이 이로웠다. 그 시절에 전여친현아내가 살던 상수로 자주 놀러 가곤 했는데, 그 동네가 너무 마음에 쏙 들어서 그곳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상수는 홍대 주위에 비해 집값이 저렴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게 비싼 곳이었다. 그렇게 가격에 맞는 자취방을 구하다가 어느 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좀 오래된 집이긴 했지만 볕이 잘 들었고, 꽤나 넓기도 하고 가격도 저렴하였다. 그렇게 나는 그 집을 계약하게 되었고, 그 집은 내가 살았던 집 중 최악의 집이었다. 

 문제를 하나하나 나열해 보겠다. 첫째는 더위였다. 그 집에는 창틀형 에어컨이 달려있었는데, 무려 금성 시절에 만들어졌었다. 이 나이 든 에어컨은 작동만 하면 모든 부품이 달달 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굴어서 틀고 잘 수가 없었다. 게다가 켠다고 해서 그리 시원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창문을 열고 잘 수도 없었던 것이 모기가 너무나 많았다. 정말 거짓말 하나 섞지 않고 하룻밤에 모기를 20마리 이상 잡은 적도 있었다. 아무리 창문을 닫고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아보아도 어디선가 모기가 들어왔다. 매번 밤마다 모기를 잡는 것에 지쳐서 그냥 코만 내놓고 잠을 잤다.

 두 번째는 추위였다. 옛날 건물이라 창문 샷시가 그리 좋은 것이 아니라 한기가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게다가 보일러도 너무 옛날 것이라, 방을 충분히 데우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 전에 가스레인지로 물을 팔팔 끓여, 그 증기로 방 안의 공기를 데워 식기 전에 얼른 자야 했다.

 세 번째는 따뜻한 물이 나오질 않았다. 보일러가 말썽이라, 따뜻한 물은 언제 나올지 알 수 없었고 나오더라도 3분 정도 나오면 다시 찬물이 나왔기에 정말 재빨리 씻어야만 했다. 그래서 겨울에는 매번 씻는 것이 전쟁이었다.

 네 번째는 벌레이다. 위에 말했듯 모기도 많이 나왔다고 했지만, 모기 정도는 애교였다. 바퀴벌레가 나왔다. 그것도 아주 큰. 벌레를 비교적 무서워하지 않던 나도 그 정도로 큰 바퀴벌레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다섯 번째는 녹물이었다. 외출을 나갔다 돌아와서 물을 틀면 녹물이 나왔다. 그래서 씻으려거든 물을 좀 틀어놓다가 씻곤 했었다. 근데 단점을 적다 보니 녹물 정도야 위에 나열한 것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긴 하다. 

 그래도 동네는 정말 좋았다. 조금만 걸어가면 홍대가 나왔고, 젊은 사람들이 득실거렸으며, 맛집은 어디에나 즐비해 있었다. 게다가 주위에 걸어서 한강까지 있어서 밤에 산책하기도 좋았다. 일이 없을 때는, 한강을 따라 주욱 걸으며 인생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이때즈음 삶의 목표를 잃어 방황하였다. 대학생 때야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으니 늘 으쌰으쌰 살 수 있었지만, 홀로 지내게 되니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분명 영화를 하고 싶은 것은 맞지만, 영화 찍는 데에는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고, 그렇다고 펜을 들어 시나리오를 쓰려고 하면 도대체 무슨 글을 써야 할지 감을 잡질 못했다. 뭔가 중요한 것이 하나 생각나서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쓰는 도중에 그 중요한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또 다른 중요한 게 떠올라서 다른 이야기를 바꾼다. 이 짓거리의 수없는 반복이었다. 이 시기에는 사람들과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놈팡이 같은 내 모습이 창피해서 그랬으리라. 그렇게 세월만 축내던 시절, 친구C와 솔이 누나가 함께 우리 집으로 놀러 왔다. 한때는 매일 보던 그 누나를 그 시기엔 연락 한 번 안 하고 살았다. 솔이 누나도 영화 현장에 들어가 일을 하다가, 요새는 쉬고 있다고 했다. 무엇 때문에 쉬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나처럼 고민이 많을 수도 있으니깐.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우린 반갑게 인사를 하고, 동네를 거닐며 수다를 떨었다. 잠시 멈춰 골목길 어귀에서 담배를 피웠다. 솔이 누나는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그래서 홀로 눅눅한 담배를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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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개월 후, 내가 살던 자취방 건물이 매매되어 급히 이사를 나가게 되었다. 다음 집은 전여친현아내 집과 접근성이 좋은 송파구 삼전동에서 구하게 되었다. 처음 삼전동에 갔을 때 정말 내키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은 9호선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기도 하고 전에 살던 상수에 비해서 너무 개성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삼전동에서 3년 가까이 살았는데, 그곳에서 3년을 살아도 늘 주변이 미로와 같아서 내 집이 어디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래도 집을 구하러 다니던 중에 부동산 중개인이 옥탑방이 하나 났는데 보러 갈 것인가 물었다. 나는 옥탑방은 관심이 없었기에 별로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까짓것 한 번 가보자 마음먹었다. 그 옥탑방은 엘리베이터 없는 6층에 위치해 있었다. 꾸역꾸역 걸어 올라 도착한 그 집은 나름 부엌 거실 방이 분리되어 있는 실평수 8평 정도 되는 공간이었다. 마당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1평 남짓한 마당도 딸려 있었다. 게다가 상당히 저렴한 가격이었기에 나는 되려 이 집에 하자가 있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나는 고민 끝에 이 집을 계약했고, 이 집에서 3년이나 살게 되었다. 살다 보니 동네도 꽤 좋았다. 일단 이사하던 시절의 삼전역은 공사 중이라 어수선했지만 완공되자마자, 이 노선은 나에게 정말 오아시스 같은 노선이었다. 그리고 상수보다야 재미는 없는 동네였지만, 없는 게 없는 동네였다. 동전노래방도 있고 편의점도 많고 주변에 롯데타워도 있으니 편리하였다. 그리고 대부분 평지에다가 길도 널찍널찍하여 자전거 타고 다니기에도 수월하였다.

 그리고 이 집의 최대 장점은 마당이 있다는 것이다. 애연가였던 나는 문 열고 나가면 바로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피우는 담배는 언제나 나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이곳에서 살 때에도 여전히 방황 중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뭘 해도 잘되지도 않는 듯하였다. 돈도 벌고 싶고 영화도 찍고 싶은데, 뭘 찍어야 할지도 모르겠었다. 아마 그 시절의 나는 영화를 정말로 찍고 싶은 것보단, 영화를 찍는 나를 보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한탄만 하며 담배를 피워대던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C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솔이 누나가 암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말기라는 것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솔이 누나는 그동안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지? 저 친구가 아는 사실을 왜 나에겐 알리지 않았을까? 내가 못 미더웠던 걸까? 내가 상수에서 살던 시절, 비 내리던 날 만난 솔이 누나는 사실 그때 항암 수술 때문에 머리를 밀고 가발을 쓰고 있었다. 나는 세상을 저주하며 살고 있었지만, 솔이 누나는 이 세상에서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연락했냐고? 안 했다. 왜 하지 않았는지 변명을 해보자면, 자존심이 강한 솔이 누나가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막연하게 언젠가 건강하게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세일 앞에서 수다 떨던 시절처럼 다시 만나 쓸데없는 소릴 지껄일 날이 올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에 만났을 때는 솔이 누나가 이미 의식을 잃었을 때였다. 

 솔이 누나는 1인실에서 지내고 있었다. 나는 꽤나 높은 층에 위치한 병실을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너무 빨리 가니까. 힘겹게 만난 솔이 누나는 곤히 자고 있었다. 딱히 살이 빠졌거나 뚱뚱해졌거나 그런 낌새도 없었다. 그냥 예전에 술에 취해서 집에 데려다줬을 때처럼 곤히 자고 있었다. 그때 술 마시는 걸 좀 말려야 했나? 담배 피우던 걸 막아야 했나? 

 옆에서 간호하고 계시던 솔이 누나 어머니는 청각은 깨어있을 수도 있으니,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병문안 선물로 사 온 만화책 사이에 편지를 넣었다. 솔이 누나에게 보내는 첫 편지였다. 병실을 나와 내려가던 계단에서, 그래도 무어라 말이라도 할 걸 그랬나 후회하였다. 다음 주에 또 들리자. 다음에는 꼭 이야기하자고 다짐하였다.

 며칠 후 쓸데없이 밝은 아침햇살에 그날도 눈을 떴다. 잠이 달아날 때까지 요깃거리라도 할 모양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에는 솔이 누나의 부고 소식이 와있었다. 아쉽게 솔이 누나는 내 편지를 읽을 기회도, 내 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오지 않았다.


 관의 무게는 솔이 누나 체구만큼이나 무척 가벼웠다.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화장터에서 금세 타버렸다. 그리고 솔이 누나는 밥솥만 한 유골함에 쏙 들어가 버렸다. 솔이 누나는 전주에 있는 한 소나무 밑에 묻히게 되었다.

 그 이후로 매년 12월 달쯤 기일을 맞이하여 전주에 내려간다. 내려간 김에 전주에 있는 맛집들을 탐방하는 것도 퍽 재밌다. 이제 나는 솔이 누나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 이제 그 누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긴 하다.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이 나는 건, 그 시절 어딜 가든 늘 함께였다는 것뿐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내가 결혼한 것도 못 봤고, 훗날 내 아이를 보여줄 수도 없다. 늙고 추해지는 서로의 꼴들을 바라보며 낄낄 조소할 날도 없다는 것도 아쉽다.

*

 그렇게 삼전동에서 3년을 살다가 결혼을 하면서 지금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대출금을 갚느라 휘청하지만 그래도 여태 살던 집 중에서 최고의 집이다. 주위에 뭐 아무것도 없긴 하지만, 조용해서 좋다. 그리고 언덕 위에 위치한 집이라 저 멀리 동탄부터 롯데타워까지 보인다. 자기 전에 야경을 보는 것도 꽤 쏠쏠하다. 그리고 16평 정도 되기에 여태 자취방에서 겪어보지 못한 집에서 ‘걸어 다니는' 행위를 할 수 있다.

 예전과는 다르게 결혼해서 그런지 철이라도 좀 들어서 그런지, 자취하던 시절처럼 낙담하는 날도 적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려고 애쓴다. 종종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하지만 오늘은 누군가는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하루이다. 삶의 이유를 굳이 찾아야 하나, 그냥 산다는 것만으로 아름답고 가치 있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려한다. 그것이 오래오래 기억하는 방법이지 않나 싶다.

 지난 나날들을 떠올려 보면 난 억수로 운 좋은 놈에 속했다. 솔이 누나와 더불어 친구ABCDE....등등 사람들의 도움과 응원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사랑은 가솔린 엔진 설>에 빠져 지내던 염세적인 젊은이에서 지금은 그래도 1인분은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요새 다시 영화를 찍고 싶곤 한다. 대신 버려진 담배꽁초나 낡은 기와 같은 것들을 찍지 않고, 여러 사람이 나와 재밌는 이야기를 지껄이는 그런 재미난 걸 기록하고 싶다. 친구이자 스승이자 부모였던 분들께 모두 감사하며, 오늘도 내일도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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